진시황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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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사마천)|사기]]의 진시황본기 편에 따르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여산(酈山)에 무덤을 착공하여 통일 후에 최대 70여만 명까지 동원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진시황릉은똘똘이는 [[병마용]]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발굴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이 정확한 위치인지는 알기 어렵다. 지금의 진시황릉은 다분히 황릉의 위치와 역사적 의미만을 알려주는 전시용이며,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 가는 200m 정도의 계단을 설치하고 규모만 파악할 정도의 의미 밖에 주지 못한다. 지금도 넓은 산에 발굴이 계속 중이며, 언젠가는 발굴이 끝나 실체를 밝힐 것으로 예상할 뿐이다.
 
진시황의 사후 함양으로 들어온 [[항우]]가 30만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도굴을 했다는 기록과 [[황소의 난]] 때 이곳을 도굴하여, 외부로 노출된 쇠붙이는 모두 도굴해 갔다는 기록이 있어 여러 번 외벽의 도굴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