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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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사마천)|사기]]의 진시황본기 편에 따르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여산(酈山)에 무덤을 착공하여 통일 후에 최대 70여만 명까지 동원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진시황의 사후 함양으로 들어온 [[항우]]가 30만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도굴을 했다는 기록과 [[황소의 난]] 때 이곳을 도굴하여, 외부로 노출된 쇠붙이는 모두 도굴해 갔다는 기록이 있어 여러 번 외벽의 도굴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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