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젤라시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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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년 젤라시오 1세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에게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두 권력]]》(Duo sunt)이라고 알려진 서한을 써서 보냈다. 젤라시오 1세는 정중하고도 강경한 문구로 두 권력(교권과 속권)의 존재를 분명히 하였다. 이 서한은 교권과 속권의 속성을 규정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ref name = "Fordham">[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gelasius1.html Medieval Sourcebook: Gelasius I on Spiritual and Temporal Power<!-- Bot generated title -->]</ref> 즉 세상을 통치하는 속권과 교회의 축성된 권한인 교권에 대한 교황의 입장과 더불어 황제라도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고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는 교권이 속권에 우선한다는 묵시적인 시사였으며, 중세기의 종교적·정치적 이상을 위한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
 
아울러 로마 시노드를 소집하여 교회 재산의 수입이 네 가지 목적(주교, 사제, 극빈자, 교회 유지)을 위하여 분배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로마 교구의 사목권 아래 있는 모든 주교는 주교 성성일에 이를 의무조항으로 서약하기로 하였고, 다른 교회들도 이와 비슷한 규정을 도입하였다.
 
==이교 풍습 금지==
마침내로마에서 이교 사상의 마지막 잔재까지 없애고자 한 젤라시오 1세는 마침내 고대 로마 시대 이후로 오랫동안 지내왔던 [[루페르칼리아]] 축제를 금지시켰다. 그는 루페르칼리아 축제를 지속시키려고 시도한 원로원 의원 안드로마쿠스에게 그를 책망하는 내용의 서한을 써서 보냈다. 이 서한을 보면 부수적으로 루페르칼리아 축제의 일부 내용이 세세하게 담겨져 있어, 역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젤라시오 1세에 의해 루페르칼리아 축제가 사라졌지만, 동시에 오늘날 그가 남긴 서한을 통해 당시 축제의 성격(다산과 정결 의식)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된 셈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축제의 이름은 정화를 뜻하는 라틴어 페브루아레(februare)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단어에서 영어로 2월을 뜻하는 단어 페브러리(February)가 탄생했다. 또한, 루페르칼리아 축제가 금지된 대신에 [[예수 성탄 대축일]]로부터 40일 후인 2월 2일에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게 되었다.
 
또한, [[마니교]]의 책들은 모두 찾아내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입구에서 소각해 버렸다.
 
짧지만 파란만장한 재위기간을 보낸 젤라시오 1세는 496년 11월 19일에 선종하였다. 사후 [[성인 (종교)|성인]]으로 [[시성 (기독교)|시성]]된 그의 축일은 그의 시신이 매장된 11월 21일로 지정되었다.
 
==저술==
젤라시오 1세는 초기 교황들 중에서 많은 글을 쓴 축에 속한다. 젤라시오 1세의 서한과 논문들은 오랫동안 중요한 자료로 남아 [[바티칸]]에 엄중히 보존되어 있다. 특히 교황의 수위권을 동방 주교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포함하여 서방 교회들의 규정들을 묶은 서한집과 칙령집이 유명하여 이 시대를 ‘젤라시오 르네상스’라고도 일컫는다. 오늘날 젤라시오 1세의 보수적인 라틴어 문체는 [[고대 후기]]와 [[중세 초기]]의 문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ref name="Ullman"/>
 
===젤라시오 교령===
[[494년]]에 개최된 로마 지방 [[공의회]]에서 젤라시오 1세는 교회 재산의 수입이 4가지 목적(주교, [[신부 (기독교)|신부]], 극빈자, 교회 유지)을 위하여 분배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Liber diurnus에 의하면, 로마 수좌 교구의 사목권하에 있는 모든 주교들이 주교 성성일에 이를 의무 조항으로 서약하기로 하였고 다른 교회들도 이와 비슷한 규정을 도입하였다. 젤라시오 1세는 [[달마티아]]와 피체눔에서 펠라지아니즘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강력히 경고하고 로마에서 이교 사상의 마지막 잔재를 없애려 하였다. [[마니교]]의 책들은 모두 찾아내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입구에서 불태워 버렸다. 또한 원로원 의원 안드로마쿠스가 복구시키려고 시도한 이교도들의 축제 루페르칼리아를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본문|젤라시오 교령}}
 
===젤라시오 성무집전서===
젤라시오 1세의 100통 이상의 서한들과 글들을 모은 젤라시오 성사 예식서가 보존되어 있다. 그의 [[미사]] 양식에 관한 글들은 6세기에 수집되어 레오니눔과 베로나 성사 예식서에 수록되어 있다.
{{젤라시오 성무집전서}}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