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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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년 [[아카키우스 분열]]이라고 알려진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에 심각한 교리상의 논쟁이 일어난 이후, 기독교계는 오랫동안 분열이 이어졌다. [[교황 펠릭스 3세]](483년-492년)와 [[교황 젤라시오 1세]](492년-496년)는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아카키우스]] 등을 비롯한 동방 교회의 주요 인사들을 대거 [[파문]]하는 등 대체적으로 동방 교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제논 (황제)|제논 황제]]는 《[[헤노티콘]]》(Henotikon)이라는 문서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와 함께 발표하여 교회의 분열을 막으려고 시도하였으나, 펠릭스 3세와 젤라시오 1세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서로 갈라서는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젤라시오 1세의 선종 후, 아나스타시오 2세는 바로 이러한 양 교회의 관계를 개선하기를 원했던 이들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McBrien>{{cite book|author=Richard P. McBrien|title=Lives of the Popes: The Pontiffs from St. Peter to John Paul II|url=http://books.google.com/books?id=M3P-nITg7BQC&pg=PA82|accessdate=8 March 2013|year=1997|publisher=HarperCollins|isbn=978-0-06-065304-0|pages=82–83}}</ref><ref name=Morehead>{{cite journal|last=Morehead|first=John|title=The Laurentian Schism: East and West in the Roman Church|journal=Church History|year=1978|volume=47|issue=2|pages=125–136}}</ref>
 
아나스타시오 2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위하자마자,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교 두 명을 교황사절로 파견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를 만나 자신의 교황 선출을 알리고 아카키우스 분열의 종식을 함께 논의하도록 하였다.<ref name=Morehead/>
아나스타시오 2세가 [[교황 젤라시오 1세]]를 이어 유화적인 정책을 펴 나가자 [[아카키우스 분열]]이 종식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아나스타시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어 교황의 선출을 알리고 [[동로마 제국]]의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의향을 보게 하였다.
 
그는 [[아카키우스]]가 주례한 세례와 서품을 승인하려는 양보의 자세를 취했으나 아카키우스의 이름만은 목록에서 제거하게 하였다. [[테오도릭 대왕]]이 동방에 보낸 [[원로원]] 의원 파우스투스에 의해 타협을 보게 되었다. 그 의원은 [[황제]]로 하여금 아나스타시오 2세가 헤노티콘을 받아들인다고 믿게 하였다. 아나스타시오 2세의 융화적인 노력은 아카키우스의 지지자였던 [[테살로니키]]의 [[대주교]]가 [[로마]] [[교회]]에서 파견한 [[부제 (기독교)|부제]] 포티누스를 영접함으로 드러났으나 로마 교회의 일부 성직자들과 마찰이 생겨 로마 교회와의 친교는 거절되었다. 아나스타시오 2세는 그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선종하였다. 아나스타시오 2세는 생전에 [[갈리아]]의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창조론의 오류인 영혼 전승설을 단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