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펠릭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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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펠릭스 3세는 후손 중 하나인 증손녀 [[트라실리아]](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고모)에게 환시를 통해 나타나 얼마 후 죽음을 통해 [[하늘나라]]로 들어갈 것이라고 예고했으며, 실제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녀 앞에 나타나 손짓하는 것을 보고 사망했다고 한다.<ref>[https://en.wikisource.org/wiki/Catholic_Encyclopedia_(1913)/Sts._Trasilla_and_Emiliana Sts. Trasilla and Emiliana]</ref>
 
펠릭스 3세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교황 선출을 [[동로마 제국]]의 황제([[제논 (황제)|제논]])에게 알린 첫 교황이다. [[부제 (기독교)|대부제수석부제]] [[교황 젤라시오 1세|젤라시오]]의 도움을 받아 [[단성설]]의 위험에 강력히 대처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아카키우스]]가 단성설을 추종하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베드로 3세|베드로 몬구스]]를 지지하면서 정통 신앙인이었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요한 1세|요한 탈라이아]]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나 [[로마]]로 피신하였다. 로마에서 [[펠릭스 3세]]를 알현한 요한 탈라이아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펠릭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들을 보내어 몬구스를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더불어 아카키우스를 로마로 소환할 것을 지시했지만, 오히려 그는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교황이 《헤노티콘》을 승인했다고 위증하여 사람들을 속였다.
 
결국 484년 7월 28일 교황으로서 처음으로 소집한 로마 시노드에서 펠릭스 3세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이자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베드로 2세|베드로 2세]]를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파문]]한 동시에 몬구스 또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에서 해임시키고 파문하였다. 그러자 아카키우스는 [[성찬예배 (동방 교회)|성찬예배]] 중에 교황을 위한 기도를 없애는 방식으로 맞대응하였다. 이리하여 시작된 아카키우스 분열은 그 후 519년까지 무려 35년간이나 지속되어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에 처음으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ref name=cole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