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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활동 예시 ==
광복후 부통령까지 역임하였던 [[김성수 (1891년)|김성수]]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탄압을 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ref>http://dna.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hn#%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A7%80%EC%9B%90%EB%B3%91%22%2C%22startIndex%22%3A0%2C%22page%22%3A1%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Date%22%3A%221938-01-01%22%2C%22endDate%22%3A%221938-12-31%22%7D</ref>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ref>[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8097# ‘고려대학’은 2010년판 신명심보감? ]</ref>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ref name="malsso1"/>,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ref>《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4-3권. p43~p97</ref>
 
{{인용문|조선 징병령 감사주간에 당하여 소감의 일단을 들어 삼 가 반도청년 제군의 일고(一考)를 촉(促)코자 한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회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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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그가 [[193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가 일부 공개되었다.
 
{{인용문|...(이상생략)...이번에 건강이 좋지 않아 조선을 떠나시게 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습니다. 각하가 조선에 계시는 동안에 여러가지로 후정(厚情)을 입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경성방직회사를 위해 특별한 배려를 받은 것은 감명해 마지않으며 깊이 감사말씀 올립니다. 석별의 정으로 별편(別便)에 조촐하지만 기국(器局)을 하나 보냅니다. 기념으로 받아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이하생략)...<ref name="malsso1"/>}}
 
오긍선(1878~1963)은 1902년 미국에 유학하여 1907년 3월 루이빌 의대를 졸업하고 10월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귀국했다. 군산, 광주, 목포의 야소교병원 원장을 지내고 1912년부터는 세브란스의전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921년에는 학감, 그리고 1934년에는 에비슨을 이어 세브란스의전의 제2대 교장이 되었다. 오긍선의 친일 활동은 비교적 일찍 시작된다. 1921년, 3·1운동 이후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친일 세력이 조직한 유민회(維民會)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924년 "내선융화의 철저한 실행"을 내걸고 결성된 동민회(同民會)에도 참여했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총독부의 교육 자문 기구인 조선교육회의 평의원을 지냈고 1937년에는 경성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 되었다. 1938년에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의 발기인과 실행위원을 맡았으며 종교 활동을 통한 황민화 운동을 목표로 하는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또 사상범의 전향을 촉진하는 경성보호관찰소의 주임대우 촉탁보호사로도 활동했다. 1939년에는 조선인의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이사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임이사를 맡았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이 되었다. <반도의 빛> 1942년 1월호에 "임전하(臨戰下)에 신년을 마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여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며, 후방에 있는 우리는 각각 자기가 하는 '직무의 군인'임을 한층 더 각오하라"고 했다.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에 학도지원병 지원 촉구를 위한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는 특집에 "환하게 열린 정로(征路) ― 주저 말고 곧 돌진하라"를 기고하여 '대동아 건설'을 위해 적국인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는 결전장으로 주저 없이 나설 것을 촉구했다. 오긍선은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자수하여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