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무라 유키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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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 간사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전년도에 설립된 직업 야구계와 아마추어 야구계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졌다. 니시무라는 같은 우지야마다 시 출신으로 직업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자이언츠]]의 에이스였던 [[사와무라 에이지]]와의 대전을 바라면서 직업 야구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1937년 춘계 대 [[야마토군|이글스]] 전에서 첫 등판해 9대 2로 첫 승리를 거두었고 다음의 대 [[쓰바사군|도쿄 세네터스]] 전에서는 첫 완봉승을 거두었다. 대학 시절에 비해 구속은 약간 저하되었으나 뛰어난 제구로 타자들을 농락하며 9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춘계 시즌에 벌어진 라이벌 자이언츠와 [[오릭스 버펄로스|한큐군]]과의 경기에서는 1승도 거두지 못했다.
1937년 추계 시즌, 요미우리와의 개막전에서 구원 등판해 승리 투수가 되었고 9월 8일부터 10월 4일까지 타이거스 14연승의 사이에 5승을 거두는 등 팀 독주의 상징적 존재가 되어 에이스 투수로 자리잡았다. 11월 14일 홈구장인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2위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5대 3의 완투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해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MVP]]는 [[
[[1938년]] 춘계 시즌에는 타이거스 독주 우승으로 전년 추계부터 연패를 달성했다. 니시무라는 이 때도 주전 투수로 활약하며 우승을 확정지은 7월 13일의 더블 헤더에서는 1차전 승리 투수가 되었다. 시즌 내내 안정적인 투구를 보이며 지난 시즌에 이어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러나 MVP는 세네터스의 [[가리타 히사노리]]에게 돌아갔다. 1938년 추계 시즌에는 우승을 요미우리에게 양보해 같은 해 11월 26일부터 12월 2일 사이에 다시 요미우리와의 우승 결정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1차전에서 선발 출장하여 연장 10회 초까지 2실점으로 호투하며 대타가 나왔고 2사 만루에서 [[후지이 이사무]]가 끝내기 볼넷을 고르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 1차전의 투수전을 끝내기 승리로 제압한 타이거스는 내리 4연승을 거두며 2년 연속 연도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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