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심마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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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릭 대왕은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심마코를 재판하기로 하였으며, 심마코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라벤나의 베드로 2세와 밀라노의 라우렌시오, 아퀼레이아의 마르첼리아노 등 이탈리아 주교들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모여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하지만 시노드는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먼저 로마의 주교(교황)인 심마코가 아닌 다른 주교들이 로마 시노드를 주재한 것부터가 도마 위에 올랐는데, 이는 심마코의 말마따나 곧 교황좌가 공석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좌가 공석이 되려면 먼저 심마코의 유죄가 입증되어 그가 교황으로서의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확신될 때에만 가능하며, 이는 곧 심마코의 죄의 유무를 제대로 심사하기도 전에 이미 사실상 판결을 결정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모인 주교들 대다수도 이에 동의했지만, 테오도릭 대왕의 압력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설상가상 시노드 소집에 반발하는 로마 시민들의 소요가 날이 갈수록 증가하자, 많은 주교가 로마를 빠져나갔다. 그나마 남은 주교들은 테오도릭 대왕에게 라벤나로 시노드를 옮겨 소집하자고 요청하였다. 테오도릭 대왕은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그해 9월 1일에 다시 로마에 모여 시노드를 소집할 것을 주문하였다. 시노드는 가까스로 소집되었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먼저 테오도릭 대왕이 교황 심마코의 유죄를 확신한다는 내용의 고발장을 제출함에 따라 시노드 측은 심마코의 혐의에 대한 증언을 청취한 다음에 판결을 내려야 했다. 여기에 심마코가 회의장으로 가는 동안 심마코의 지지자들과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이 길에서 만나 서로 싸우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많은 성직자가 피살 내지는 부상당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에 심마코는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돌아가 칩거하면서 시노드 대표단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성 베드로 대성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ref>Richards, ''Popes and the papacy'', p. 72</ref>
 
결국 시노드에서는 테오도릭 대왕에게 또다시 탄원하여 시노드를 해산하고 주교들이 자신의 교구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테오도릭 대왕은 10월 1일자로 주교들에게 어떻게든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리하여 502년 10월 23일 주교들은 팔마라고 불리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시노드를 소집하였으며, 이전 두 회기의 사건들을 되짚어 본 다음 교황은 [[성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재판할 외에는권리가 어느없으며, 누구에게도 심판받지문제는 않는다는하느님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더불어 심마코와 대립한 이들은 모두 그와 화해해야 하며, 그의 동의 없이 로마에서 미사를 집전한 성직자들은 누구나 [[이교 (기독교)|이교]]를 일으킨 죄로 벌을 받아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밀라노의 라우렌시오와 라벤나의 베드로의 주재 아래 주교 76명이 이 결정에 서명하였다.<ref>Richards, ''Popes and the papacy'', p. 73</ref>
 
시노드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라우렌시오는 로마로 돌아와 이후 4년 동안 로마 내 성당들을 관리하고 페스투스 의원의 지원 아래 사실상 교황으로서 군림하였다.<ref>Davies (trans.), ''Book of Pontiffs'', p. 98</ref>
 
심마코가 [[이탈리아]] 주교회의에 참여하기로 동의하자 테오도릭은 로마에서 심마코를 재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느 종교회의도 교황을 재판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마코가 회의장으로 가는 동안 심마코의 지지자들은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을 길에서 만나 서로 싸우게 되었는데 일부 성직자들이 죽는 사태도 일어났다. 심마코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돌아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회의가 속개되어 팔마나무 회의로 알려져 있는 제4회기에서 교황은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재판받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 심마코는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되어 교회의 재산 관리권을 가지게 되었다. 테오도릭은 라우렌시오가 교황이 되도록 이미 허락하였으므로 심기가 불편하였다. 그 후 로마는 4년간 언쟁과 소란의 연속이었고 거의 모든 교회의 소유권은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양측은 유인물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부제 디오스코루스가 테오도릭과 중재를 벌여 로마의 평화를 회복시키자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은 교회의 재산권을 심마코에게 넘겨주고 점차적으로 심마코에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