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심마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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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년 3월 1일 심마코는 로마 시노드 소집을 선언하였으며, 여기에 72명의 주교와 로마 교구 전체 사제가 참석하였다. 라우렌시오 역시 시노드에 참석하여 나중에 캄파냐 주의 누체리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교황 연대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시노드 이후에 심마코가 라우렌시오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직접 그를 주교로 수품했으며, 라우렌시오는 심마코에게 교황직을 양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은 심마코가 협박과 회유를 통해 라우렌시오를 강제로 누체리아의 주교로 임명했다고 주장하였다.<ref>Davies (trans.), ''Book of Pontiffs'', pp. 44, 97</ref> 한편 시노드는 교황이 살아있는 동안에 장차 차기 교황이 되기 위해 표를 얻으려고 선거 운동을 하거나, 그런 목적으로 모임을 갖는 성직자는 면직시키기로 결의하였다.
 
501년 라우렌시오의 지지자였던 루피우스 포스투미우스 페스투스 의원은 심마코를 다양한 혐의로 고발하였다. 심마코가 고발당한 혐의는 심마코가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모든 교회가 지키고 있는 지정된 날이 아닌 다른 날에 봉헌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이었다. 고소장을 받은 테오도릭 대왕은 심마코에게 [[아르미니움]]에 출두할 것을 지시하였다. 테오도릭 대왕의 부름에 아르미니움에 당도한 심마코는 자신에게 예수 부활 대축일 문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부정한 행실과 교회 재산 남용을 포함한 각종 혐의가 자신에게 제기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ref>The "Laurentian Fragment" states that, while walking along the seashore, he saw the woman with whom he was accused of committing sin. Davies (trans.), ''Book of Pontiffs'', p. 98</ref> 이에 당황한 심마코는 전전긍긍하다가 한밤중에 수행원 한 사람만을 대동한 채 몰래 아르미니움을 빠져 나갔다. 그러나 그의 도피는 오히려 역효과를 드러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유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라우렌시오와 그와 함께 로마 밖으로 추방당한 고위 사제들은 자신을사제들이 지지하는지지 사제들과세력을 백성들에등에 의해업고 로마로 귀환하였다. 라우렌시오와 함께 로마로 입성한 알티눔의 베드로 주교는 502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테오도릭 대왕에 의해 로마 교구 행정을 맡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ref>Richards, ''Popes and the papacy'', p. 71</ref>
 
===시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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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노드에서는 테오도릭 대왕에게 또다시 탄원하여 시노드를 해산하고 주교들이 자신의 교구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테오도릭 대왕은 10월 1일자로 주교들에게 어떻게든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리하여 502년 10월 23일 주교들은 팔마라고 불리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시노드를 소집하였으며, 이전 두 회기의 사건들을 되짚어 본 다음 교황은 [[성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재판할 권리가 없으며, 이 문제는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더불어 심마코와 대립한 이들은 모두 그와 화해해야 하며, 그의 동의 없이 로마에서 미사를 집전한 성직자들은 누구나 [[이교 (기독교)|이교]]를 일으킨 죄로 벌을 받아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밀라노의 라우렌시오와 라벤나의 베드로의 주재 아래 주교 76명이 이 결정에 서명하였다.<ref>Richards, ''Popes and the papacy'', p. 73</ref>
 
시노드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라우렌시오는 로마로 돌아와 이후 4년 동안 로마 내 성당들을 관리하고 페스투스 의원의 지원 아래 사실상 교황으로서 군림하였다.<ref>Davies (trans.), ''Book of Pontiffs'', p. 98</ref> 그리하여 심마코를 따르는 세력과 라우렌시오를 따르는 세력 간의 싸움이 더 크게 확장되었다.
 
심마코가 [[이탈리아]] 주교회의에 참여하기로 동의하자 테오도릭은 로마에서 심마코를 재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느 종교회의도 교황을 재판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마코가 회의장으로 가는 동안 심마코의 지지자들은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을 길에서 만나 서로 싸우게 되었는데 일부 성직자들이 죽는 사태도 일어났다. 심마코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돌아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회의가 속개되어 팔마나무 회의로 알려져 있는 제4회기에서 교황은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재판받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 심마코는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되어 교회의 재산 관리권을 가지게 되었다. 테오도릭은 라우렌시오가 교황이 되도록 이미 허락하였으므로 심기가 불편하였다. 그 후 로마는 4년간 언쟁과 소란의 연속이었고 거의 모든 교회의 소유권은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양측은 유인물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부제 디오스코루스가 테오도릭과 중재를 벌여 로마의 평화를 회복시키자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은 교회의 재산권을 심마코에게 넘겨주고 점차적으로 심마코에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