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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에서부터 몰려온 [[훈족]]의 서방 진출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다. 가장 먼저 압력을 받은 것은 앞서 설명한 서고트족으로, 족장 알라리크가 정식으로 서고트족의 왕으로 취임하여(알라리크 1세) 로마군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395년 1월부터 제국의 영토를 침범, [[트라키아]](라틴어: Thracia, 지금의 [[발칸 반도]] 남동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에 스틸리코는 동로마와의 공동방위노선을 택해, 메디오라눔을 포위한 서고트족 군대를 격퇴한다. 그러나 아르카디우스의 측근으로 친위대 장관이었던 루피누스의 방해로 알라리크를 더 추격하지 못하고 서로마로 귀환해야 했다. 동시대의 시인 클라우디아누스에 의하면, 아드리아 해변을 따라 진군해오던 스틸리코는 그리스 북동부의 항구도시 [[테살로니카]]에서 동방 병력을 콘스탄티노플로 돌려보내고 서방 병력은 서쪽으로 귀환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이를 비잔티움동로마 궁정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한다는 아르카디우스의 명령서를 받았다. 이때 스틸리코는 "비겁한 그 바보(루피누스)의 짓이야!"라는 분노를 토했다고 한다.
 
루피누스는 스틸리코의 휘하에 있던 동로마군 소속 군단을 철수시킴으로써 방해에 성공했지만, [[콘스탄티노플]] 부근 1마일 떨어진 마르스의 들판에 있는 헤브도몬 궁정에서 대신과 황제가 군대에 예를 바치는 자리에서 병사에게 살해당해 버린다.<ref>루피누스의 오른손은 잘려져 콘스탄티노플의 거리 구석구석까지 돌려지면서 조롱거리가 되었고 목은 긴 창끝에 꽂혀 전시되었다. 다만 그의 아내와 딸은 교회의 보호를 받아 남은 여생을 예루살렘의 조용한 은거지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며 보냈다고 한다.</ref>
길도는 북아프리카의 전 병력을 동원해 모두 7만의 군대로 맞섰지만, 첫 전투에서의 어이없는 패배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스키엘은 승리를 얻었다. 길도는 동로마로 도망치려다 타브라카 항구에서 주민들에게 붙들려 지하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틸리코는 이번에도 '공화국의 법률'을 존중하는 태도로 길도측 포로의 판결을 로마서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맡겼다. 한편 마스케젤은 전쟁이 끝난 뒤 밀라노 궁정으로 귀환했는데, 스틸리코와 함께 다리를 건너다 아무 이유없이 낙마해 강에 빠지더니 미처 구할 틈도 없이 익사하고 말았다.<ref>조시무스에 따르면 이것은 우발적인 사고를 가장한 스틸리코의 소행이었다.</ref> 얼마 뒤 스틸리코는 자신의 딸 마리아를 황제 호노리우스와 결혼시켰다.
 
=== 알라리크의 이탈리아 침공 ===
서기 [[405년]],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가 게르마니아의 북쪽 끝에서 수에비족ㆍ반달족ㆍ부르군트족으로 이루어진 로마의 성문 가까이까지 진군해와서 서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한 군대를 진주시켰다. 전장에 나아갈 힘이 있는 남자 20만 명,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예들까지 합치면 40만 명에 달했다.
 
이듬해부터 이들은 이탈리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로마는서로마는 너무 쇠약해져서 도나우 강의 요새를 복구하거나 적극적인 대처로 이들의 침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틸리코는 이탈리아 방어만을 목표로 삼고, 다시 한 번 군대 소집과 신병 모집에 착수했지만 엄하게 끌어가려고 해도 다들 겁에 질려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이에 스틸리코는 탈영병들을 체포하거나 회유하는데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병적에 이름을 올린 노예들은 금화 두 닢과 함께 자유민으로 만들어주는 등의 조치로 간신히 3,4만 명의 병력을 모았다. 여기에 대규모의 야만족 보조군으로 30개 군단을 보강했다.<ref>알라니족은 개인적으로 스틸리코를 위해 복무에 나섰고, 훈족과 고트족은 라다가이수스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기꺼이 동참했다고 한다.</ref> 라다가이수스의 군사들이 알프스, 포 강, 아펜니노 산맥을 지나는 사이, 티키눔(혹은 파비아)에 있던 스틸리코는 조용히 멀리 떨어진 병력이 모두 집결할 때까지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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