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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한일병합 조약]] 직후 도산 [[안창호]]가 거국가를 남기고 출국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는 갈등, 방황하였다. 그는 병환중인 아버지와 노모와 아내, 2남 2녀가 있고 서모에게서 어린 이복동생 둘이 있어서 이들을 책임져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출국을 주저했다. [[이상재]]는 그에게 여러 번 [[이승만]], [[안창호]]의 사례를 들며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후일 그는 이를 두고두고 통탄해하게 된다. 그해 [[10월]] YMCA [[기독교 청년회]] 부회장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고, [[1910년]] [[12월 4일]] [[미국]]에서 열리는 선교회 공회에 참석차 출국하여 [[1911년]] [[1월]] 귀국하였다. 이후 교육 활동 외에 토지 매입에 힘써 [[선산군]] 해평면 금산동(金山東) 산 72번지, [[고양군]] 부암리(付岩里), [[경성부]] 견지동,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일대의 대 농지를 소유하였다.
 
윤치호는 다양한 책을 두루 독서하며 시름을 달랬는데, [[삼국지]], [[삼국지연의]], [[손자병법]], [[서유기]], [[수호전]], [[춘추]], [[한비자]] 등의 [[중국]] 고전에서부터 [[마키아밸리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니체]]의 [[신은 죽었다]] 등의 서적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1911년]] [[9월 22일]] 아버지 [[윤웅렬]]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윤웅렬]]을 내심 존경하면서도 적극적인 애국심을 갖지 않은 것에 실망,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식적이나마 [[남작]] 작위를 다시 수여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