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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 대한제국기 활동 ====
[[1902년]]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4개월만에 사직하였다. 이후 [[1902년]]부터 [[탁지부]]와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다. [[1935년]]에 출간된 《조선공로자명감》<ref>{{뉴스 인용
|저자=성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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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ref>{{웹 인용 |url= http://db.history.go.kr/url.jsp?ID=jw_1908 |제목= 대한제국 직원록 1908년 (02. 내각 > 문관전고소) |확인일자=2008-11-18 |형식= |작품명=한국사데이터베이스 }} </ref>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품계는 종2품이었다. 이 기간 중 [[보성전문학교]]의 [[경제학]] 강사를 맡았으며, 《재정학》, 《경제학》과 같은 경제학 교재도 집필하여 서구 경제학을 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한일 병합으로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한 뒤 곧바로 [[전라남도]] 참여관으로 발탁되었다. [[1918년]]에는 [[강원도]] 지사, [[1921년]]에는 전라남도 지사로 승진하였다. 원응상이 전남지사를 맡고 있을 때 [[암태도 소작쟁의]]가 발생하여 이 사건의 주무 관료였다.<ref>{{서적 인용
|저자=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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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1910년]] [[10월]] 전라남도 참여관에 임명되어 1918년 9월까지 재직했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전라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맡아 조선총독부의 토지 조사, 정리 사업에 참여하였다. 1915년 11월 일본에 방문하지는 않았으나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8년]] [[9월]] 강원도 도장관으로 승진했으며, 1919년 8월 지방관제 개정으로 강원도지사로 직책이 바뀌면서, 다시 유임되었다. 1920년 8월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1년 8월 전라남도지사로 발령받았다.
 
[[전라남도지사]]로 재직할 때 전남 유림의 친일화를 목적으로 결성된 전라남도유도창명회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23년에 중국 출장을 다녀온 뒤 잡지 [[창명]]에 "지나 시찰담"을 게재했다. 1924년 조선경찰협회 전라남도지부장을 겸임했다. [[1924년]] 12월에 전남지사를 마지막으로 퇴관하여 중추원 참의에 올랐다. [[1926년]]부터 '아세아 민족의 결합, 내선 융화, 사상 선도'를 목적으로 한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 생애 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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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사를 마지막으로 [[1924년]]에 퇴관하여 중추원 참의에 올랐다. 중추원 참의이던 [[1933년]]을 기준으로 정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조선공로자명감》은 원응상을 광풍제월의 인품을 소유한 인물로 평가하면서, “씨가 반도통치에 진췌한 공적은 심대하였다.”라고 적었다.
1928년 9월 [[교토]]에서 열린 [[쇼와 천황]] 즉위식에 초청받아 참석하고, 11월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장으르 받았다. 그 해 [[10월]] 조선박람회협찬회 상담역,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지냈다. [[1930년]] [[12월]] [[수양단]] 조선연합본부 찬조원을 맡았다.
 
전남지사를[[1933년]] 마지막으로[[2월]] [[1924년우카키]] 퇴관하여조선총독의 특명을 받아 '중추원 참의에참의 위문단'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만주에 파견되어 만주에 파견중인 일본군을 위문하고 재만 조선인의 생활 상황과 전선의 자력갱생운동 실정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33년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의 경제부 주사위원에 올랐다선출되었다. 중추원 참의이던 [[1933년]]을 기준으로 정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조선공로자명감》은 원응상을 광풍제월의 인품을 소유한 인물로 평가하면서, “씨가 반도통치에 진췌한 공적은 심대하였다.”라고 적었다.
한편,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피살되었을 때 공식 추도회를 주도한 [[관민추도회]]에 참여하였고, [[동민회]]에도 가담하는 등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다.<ref>{{서적 인용
 
1936년 10월 조선산업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한편,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피살되었을 때 공식 추도회를 주도한 [[관민추도회]]에 참여하였고, [[동민회]]에도 가담하는 등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제목=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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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67,237,319쪽
|꺾쇠표=예
}}</ref> [[1938년]]에 [[중일 전쟁]]과 관련하여 [[조선방공협회]]가 창립되자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맡기도 했다. 이후 [[공산주의]] 사상 박멸을 목표로 활동하는 [[조선방공협회]]에 적극 활동하였다.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전라남도지사]] 고문을 맡았다가 임시로 부지사를 맡아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 최후 ====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였을 때 80대의 고령으로 생존해 있었다.<ref>{{서적 인용
|저자=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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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259~260쪽
|꺾쇠표=예
}}</ref> 이에 따라 반민특위에 체포 또는 소환된 기록은 확인되나, 구체적인 처리 내용은 알 수 없고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처벌도 받지 않았다. [[1958년]] [[8월 20일]]에 사망하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