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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다시 외부 번역관으로 관직에 오른 뒤, [[1903년]] [[12월]] 중추원 의관에 선임되었으나 바로 사직했다. 이후 1904년 7월 외부 참서관, 1906년 1월 [[의정부]] 참서관을 거쳐 [[1907년]] [[6월]]에는 탁지부 사세국장과 수도국장을 지냈다. [[1905년]] [[6월 2일]]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다른 관료들과 함께 [[시강원]]을 통해 [[일본]]에 축하 편지를 보냈다. [[1905년]] [[12월 26일]]에는 경상북도 암행 시찰을 다녀와, [[대구부]]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본인을 적발하여 처벌할 것을 상주하였다.
 
[[1908년]] [[5월]] [[대한학회]] 찬성회의 창립발기에 참여했다. 1908년 1월 탁지부 사계국장(司計局長)에 임명되고, 사계국장으로서 국유삼림산야처분심사회 위원을 겸임했다.
 
1908년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ref>{{웹 인용 |url= http://db.history.go.kr/url.jsp?ID=jw_1908 |제목= 대한제국 직원록 1908년 (02. 내각 > 문관전고소) |확인일자=2008-11-18 |형식= |작품명=한국사데이터베이스 }} </ref>을 역임하였다. [[1910년]] [[6월]] [[칙임관]] 2등으로 승급되고 그해 [[10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원응상의 품계는 종2품이었다. 이 기간 중 [[보성전문학교]]의 [[경제학]] 강사를 맡았으며, 《재정학》, 《경제학》과 같은 경제학 교재도 집필하여 서구 경제학을 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