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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량욱'''(康良煜, {{표준어|'''강양욱'''}}, [[1903년]] [[12월 7일]] ~ [[1983년]] [[1월 9일]])은 [[일제침략기]]의 [[장로교]] [[목사]], 교육자였으며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교육자, 정치인이다. 북한 임시인민위원회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북한]] 최고인민회의조선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 상임위원회 서기장 등을 지내고 [[1972년]] 국가 [[부주석]]이 되었으며 81년 부주석에 재선되었다. [[김일성]]의 외삼종조부이며 칠골 창덕소학교 당시 담임이었고, [[강돈욱]]의 6촌 형제였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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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쇠표 = 예}}</ref>
===수업===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의 육촌 동생이다. [[1923년]] 평양의 [[숭실고등학교|숭실중학교]]를 중퇴하였다.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하였고, 귀국후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였다. 육촌 형 [[강돈욱]]과 함께 칠골 창덕학교 창립에 참여하여 교사로 활동했다. 그 뒤 [[창덕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외삼종손 [[김일성]]의 담임으로서 그를 가르치기도 했었다. 이에 따라 광복 후 [[김일성]]이 귀국하고 집권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가까운 자문역을 맡았고, 북한북조선 [[개신교]]와 친공산주의 지식인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정치===
[[1945년]] [[9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45년 [[11월]] 북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1946년]] [[북조선민주당]] [[평안남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된 데 이어 <ref>1946년 2월 8일~: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214쪽</ref> [[1946년]] 현재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전신인 북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장에 피선되고, 46년 2월 8일 소련 점령군 사령부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북한에서소련군정 관내에서 사실상의 단독 정부로 기능케 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의 모체가 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이 되었다.<ref>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9</ref> 그해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낸 [[백의사]] 자객에 의해 암살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그의 아들, 며느리, 딸이 피살당하였다. [[1948년]] 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석하였고, 그해 구성된 [[최고인민위원회]] 1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서기장을 역임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1~5대 대의원을 연임하였다. 조선민주당 인사들이 월남하고 [[조만식]]이 사망한 뒤로는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1959년]])을 맡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요직에 임명되어 [[1960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1971년]] [[대외문화연락협회]] 위원장, [[1972년]] 국가 부주석<ref name="부주석">[http://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12679 Home | Korean UMC<!-- 봇이 따온 제목 -->]</ref> 겸 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종교활동===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외교]] 활동에 활발히 참가하기도 했다. [[1981년]] 다시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 부주석에 재선되었다.<ref name="부주석"/> 그 외에 개신교 교회 관련 활동으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한국 전쟁]] 이후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에서 사라진 [[개신교]] 신학원을 개원하는데 노력하여, [[1972년]] [[평양신학원]]을 재건하는데 참여하였다.<ref name="부주석"/>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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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국의 통일운동가]]
[[분류:테러 피해자]]
[[분류:개신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