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충렬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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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忠烈祠)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송상현 (1551년)|송상현]]을 모신 [[사당|사우]]이다.
 
선조 38년 (1605) 왜란이 끝난뒤 당시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읍성의 남문 안에다 충렬공 송상현의[[송상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송공사단(宋公祠壇)을 세운 것이 충렬사의 시초가 된다.
인조2년 (1624),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의 소청(訴請)으로 임금이 충렬사(忠烈祠)라는 사액을 내림과 동시에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로 부산진성 싸움에서 전사한 정발이 배향(配享)되었다.
 
효종3년 (1652),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성내의 충렬사(忠烈祠) 사우의 위치가 낮아 땅이 저습하고 규모조차 작아 보잘 것 없어 사당 위치로는 적합지 않다하여 현재의 자리인 래산(萊山) 아래 안락리로 옮겨 지으면서 송상현 부사의 충절과 학행이 후세의 사표가 되므로 이를 후세에 가르치기 위해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예를 따를 것으로 하여 안락서원(安樂書院) 으로 불렀다. 이때 서원에 별사(別祠)를 지어 첨사 정발과 교수 노개방의 위패를 봉안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첨사 정발은 안락서원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숙종35년(1709),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성내에 있던 충렬사 옛터에 별사(別祠)를 세우고 임란 당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을 병향하고, 유생 문덕겸(文德謙)을 이에 배향하였으며, 별사 옆에 별채를 지어 비장(裨將)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등 9인의 의사를 추향(追享) 할 것과 별사의 사액을 조정에 탄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