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베 료키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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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sdnf1999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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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지사 시절 ==
[[1967년]] [[일본사회당|사회당]], [[일본공산당|공산당]]의 추천으로 입후보하여 [[자민당]],[[민사당]] 추천의 마쓰시타 마사
토시 릿쿄대 교수와 [[공명당]] 추천의 아베 켄이치 시부자와 해운사 사장을 제치고 도지사로 당선되었다. [[1971년]], [[1975년]]에 연속으로 재선되었으며, 특히 1975년에는 현 도쿄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대결하였다. 당시에는 부라쿠 해방동맹을 둘러싸고 사민당과 공산당사이에공산당 사이에 대립관계에 있어있었기에 양당의 추천을 얻기 어려웠고, 이에 본인은 불출마를 염두해 두기도 했으나, 이시하라에 의한 파시즘의 부정을 저지한다는 기치아래 출마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후에 (1999년) 도지사가 된 이시하라는 “도쿄는 예전 공산주의자 도지사때문에 발전에 뒤쳐졌다”[http://homepage3.nifty.com/m_and_y/genron/ishihara/data/20010127mainichi.htm]라며 미노베를 비판하였다.
그는 혁신계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많은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중 잘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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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경주에 대한 지방정부의 지원 금지
 
미노베 도지사는 [[1971년]] 일본의 현직 도지사로서는 유일하게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면담하는등,면담하는 대북정책에등, 있어대북정책에서 유화적인 편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보수적인 일본인들로부터 “친북정책”으로 비판받았다. 후에 그가 실시한 재일 조선인에 대한 대부분의 정책은 이시하라 신타로의 취임과 [[일본인 납치사건]]이후 무효화되었다.
그는 [[북조선|조선]]과 [[대한민국|한국]]정부중에서 상대적으로 사회주의 조선과 더 가까운 편이었으나, 그가 실시한 재일외국인 의료보험혜택정책은 많은 대한민국 국적의 재일한국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