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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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서깊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구가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새로 생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구]]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촌인 테오필루스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간의 대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점차 부상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구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양측의 긴장감은 [[428년]]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직에 오르자 점차 고조되어 결국 교리논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양측의 종교적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벌어졌는데 키릴로스는 한 [[위격]] 안에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통일되어 있음을 주장했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는 [[신]]의 위격과 [[인간]]의 위격, 서로 다른 두 위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위격 주장은 결국 [[성모 마리아]]의 호칭에 관한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키릴로스가 성육신을 통해 두 본성이 내적 통일을 이루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마리아를 [[테오토코스]]([[그리스어]]로 ''[[하느님]]의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로 부를 것을 주장하자 네스토리우스는 이를 거부하며 테오토코스 대신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뜻)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대하여 키릴로스는 즉시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결국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를 통하여 양측의 입장을 정리하고자 했다. 키릴로스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했는데, 당시 황제의 누나였던 황후 유도키아와 경쟁하던 [[풀케리아]]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교황 첼레스티노 1세]]와 공모하여 철저히 [[네스토리우스파]]를 공격하려 했으며, 자신과 이견을 보이던 [[안티오키아]]의 주교단이 늦게 도착한 것을 기회로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하고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