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공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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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래 ==
젊은이의 거리, 문화의 거리인 대학로에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 공원의 광장 중앙에 있는 ‘서울대학교 유지기념비(遺趾記念碑)’는 그 곳이 과거 서울대의 본부와 문리과대학, 법과대학이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준다. 공원의 오른 편에 고색창연한 벽돌 건물이 눈에 띠는데 [[1931년]] [[10월]] 준공돼 경성제국대학의[[경성제국대학]]의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1945년]] 해방 이후 서울대 본관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이곳에 언제부터인지 마로니에 나무가 있어 마로니에 공원이라 불려져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과거 이 공원 터에는 [[서울대학교]]의 본관이 있었으나,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구]] 신림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하면서 대학본부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이 공원이 조성되었다. 캠퍼스에 [[마로니에]] 나무가 세 그루 있던 것을 유래로 ‘마로니에 공원’이라 이름 붙여졌다. 공원 내부에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시절 모습을 묘사한 조형물이 있다.
[[1972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문화예술진흥원의 청사로 사용됐고 현재는 ‘예술가의 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1981년 사적 제27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며 대학로라는 이름을 설명해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제 이름만 남아있는 동숭동 캠퍼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센 강으로 부르던 학교 앞 대학천과 미라보 다리로 부르던 그 위의 다리 그리고 누가 심었는지 명확치 않지만 캠퍼스의 명물이 된 마로니에 나무로 상징되고 기억될 뿐이다.
 
[[1972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문화예술진흥원의 청사로 사용됐고 현재는 ‘예술가의 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1981년 사적 제27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며 대학로라는 이름을 설명해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제 이름만 남아있는 동숭동 캠퍼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 강으로 부르던 학교 앞 대학천과대학천, '미라보' 다리로 부르던 그 위의 다리곳, 그리고 누가 심었는지 명확치 않지만 캠퍼스의 명물이 된 '마로니에' 나무로 상징되고 기억될 뿐이다.
 
== 역사 ==
[[유신체제]]에서 벗어나 자유화 물결이 넘실되던 시절의 [[1985년]], ‘동숭동 대학로’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됐다. 정부 주도로 ‘문화예술의 거리’를 조성하면서 사용된 명칭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곳은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서고 이후 서울대학으로 바뀌면서 대학가 문화가 주를 이뤘던 곳이다. 대학이 옮겨간 자리에 신촌을 비롯해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문화단체와 극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2004년]]에는 [[인사동]]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 ‘문화지구’로 지정돼 서울의 문화를 대표하는 거리가 됐다.
 
과거 이 공원 터에는 [[서울대학교]]의 본관이 있었으나,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구]] 신림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하면서 대학본부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이 공원이 조성되었다. 캠퍼스에 [[마로니에]] 나무가 세 그루 있던 것을 유래로 ‘마로니에 공원’이라 이름 붙여졌다. 공원 내부에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시절 모습을 묘사한 조형물이 있다.
 
일부에서는 대학교육의 발상지로서 동숭동 캠퍼스가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장소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었고 일제 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이 갖는 흔적을 지워버림으로써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동숭동 캠퍼스는 관악으로 옮겨갔다.<ref>[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7008 '마로니에 공원'이 간직한 기억들 … 人材를 관악으로 옮겨간 까닭은?] 류지석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 교수신문(2013.04.08) 기사 참조</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