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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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4·19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 역사 ==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망명지인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기거할 집이 없어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당시의 실업가 권영일(權寧一) 등을 비롯한 30여명의 도움으로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돈암장에서 이곳 이화장으로 옮겨서 1947년 11월부터 기거하였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정부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48년 7월 경무대로 이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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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의 좌청룡인 낙산 서쪽 기슭에 위치하여 서향〔卯坐酉向〕인 본채는 192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채는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응접실(접견실)과 서재가 있다. 대청마루 왼쪽에는 침실과 부엌이 있다. 본채는 그 자체로는 별다른 특징은 없으나 대통령 내외의 검소한 생활을 느낄 수 있는 건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통 한옥이 그 시대상을 수용하며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벌대 장대석 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7칸, 측면 6칸, 굴도리,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1988년 '대한민국건국대통령우남 이승만박사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역사자료 및 평소에 사용한 기구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본채 서쪽 언덕 아래에는 생활관이 있다.
 
이화장 본채에서 조금 떨어져 동남쪽 언덕에 막돌 화강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위치한 조각당은 역(逆)'ㄱ'자형의 평면을 한 아주 작은 건물인데, 약간 북쪽으로 튼 서향〔乙坐申向〕이다. 회첨골을 이룬 곳에 위치한 1칸 반 온돌방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장마루를 깐 작은 대청 한 칸이 서쪽을 향해 있고, 그 서쪽으로 부엌 한 칸이 딸려 있다. 굴뚝은 온돌방 동쪽 밖에 독립하여 서 있으며, 온돌방 앞에는 작은 쪽마루가 놓였다. 기단 없이 네모 화강석 초석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납도리,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내각을 조직하던 당시에 쓰던 돗자리와 나무의자가 있고, 대청마루 처마 아래에는 '組閣堂' 현판이 걸려 있다. 본채와 조각당 주변에는 지형을 따라 가꾼 정원과 산책로가 있다.
 
또한 [[이승만]]의 영부인 프란체스카는 [[1945년]] 8ㆍ15광복과 함께 한국에 왔고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의 대통령이 되자 오스트리아(호주) 여성 프란체스카는 퍼스트 레이디로 6ㆍ25와 4ㆍ19 등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체험했다.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길에 동행하여 [[1965년]] 이승만이 사망할 때까지 병상을 지켰고, [[1970년]]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내다 [[1992년]] 사망했다. 이렇게 [[1946년]] [[장개석]] 총통이 한국을 방문할 때 가져온 냉장고는 무려 35년간 사용했으며, [[1958년]]에 최초로 생산된 국산 모직으로 만든 옷을 34년 동안이나 입었다.이화장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도 연료 절약을 위해 겨울철이면 본채대신 경비실에서 추운 겨울을 지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ref>「이야기로 읽는 대한민국 경제사」, 프란체스카 여사의 절약정신, 석혜원 저, 미래의창(2008년, 33p) 참조</ref>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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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택상]]
{{Col-end}}
 
== 주석 ==
<references/>
 
== 참고자료 ==
* 「조선의 문화공간」, 이종묵 저, 휴머니스트(2006년, 100p)
 
* {{문화재청 문화재|13,0497000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