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회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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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백장은 [[767년]] 무렵에는 남강(南康)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만나 사사하였다.<ref name="글로벌-백장"/> 마조 밑에서 수도를 하여 대오하였다.<ref name="글로벌-백장"/> 후에 백장산에 들어가 많은 문하생 제자들을 지도 교화하였다.<ref name="글로벌-백장"/> 그 중에는 [[황벽희운]](黃檗希運)과 [[위산영우]]도 있었다.
 
"하루 지음(作)이 없으면 하루 먹지 아니한다"고 하는 백장의 말은 그의 선풍(禪風)을 나타내어 주는 유명한 말이다.<ref name="글로벌-백장"/> 그는 백장산에 율원(律院)으로부터 독립한 선원(禪院)을 창설하고 다시 율전(律典)의 규정에 구애받지 않는 선종 독자의 규율을 만들어냈다.<ref name="글로벌-백장"/> 이것이 《[[백장청규]](百丈淸規)이다.<ref name="글로벌-백장"/> 많은 수도승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자급자족하는 집단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는데 《[[백장청규]]》는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ref name="글로벌-백장"/>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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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당나라의 승려]]
[[분류:선승]]
[[분류:당나라 사람]]
[[분류:푸젠 성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