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 (촉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
|||
6번째 줄:
마초는 [[192년]]([[초평]] 3년) [[마등]]과 [[한수 (후한)|한수]](韓遂)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진입하자 한 왕조는 [[한수 (후한)|한수]]를 진서장군에 임명해 금성으로 귀환시키고 [[마등]]을 정서장군에 임명해 미에 주둔시킨다.
[[위략]]에서는 마초가 [[염행]]과 싸웠다가 죽을 정도로 얻어맞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두고 출처가 [[위략]]이라는 이유만으로 신뢰하지 않는 의견도 있으나 [[배송지]]는 주석으로 사료를 인용할 때 신뢰도가 떨어지거나 모순이 발생하는 기록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반박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같은 [[위략]]에서 [[유선]]이 유비와 헤어져 노예로 생활했다거나, [[제갈량]]이 [[삼고초려]] 이전에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거나 하는 기록 등은 인용을 하면서도 그 모순과 허황됨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염행]]과 마초의 대결에 대한 기록은 별다른 반박이나 의심을 표하지 않고 그대로 차용했다. 그 시기에 [[마등]]과 [[한수]] 사이에 전투가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에 [[삼국지연의]]를 통해 생성된 선입견을 제외하고 보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는 기록이다.
▲ 사례교위 [[종요]](鍾繇)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 (후한)|한수]]와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복종하는 경우와 반항하는 경우의 이해 득실을 각각 설명했다. [[마등]]은 이에 응하고 아들 마초를 [[종요]] 밑으로 보냈다.
그리고 승상이 된 [[조조]](曹操)는 마초까지 초빙하지만 마초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