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젤라시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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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라시오 1세는 492년 3월 1일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위하였다. 그는 전임 교황 펠릭스 3세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 황제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싸움을 이어갔다. 게다가 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아카키우스]]의 이름을 [[디프티카]]에서 제거할 것을 촉구하는 강경한 입장을 밝히면서 상황은 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이자 정통 신앙을 가졌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페미우스|에페미우스]]는 교황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이와 같은 교황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교섭은 깨지고 말았다.
 
로마의 관점에서 볼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분열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는에게는 오직 신성(神性)만이 있었을 뿐, 인성(人性)은 없었다는 주장([[단성설]])은 [[이단]]적인 주장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젤라시오 1세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 안의 두 가지 본성》(De duabus in Christo naturis)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아카키우스 분열 기간 동안에 젤라시오 1세는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하기 위해 로마 교황은 [[사도 베드로]]를 계승한다는계승했다는 것을주장을 근거로근거 내세워삼아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를 아우르는통틀어 전체교회 교회는전체가 교황의 통치를 받는다는 [[교황 지상권]]을 주장하여주장함으로써 후임 교황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한편 동로마 제국에서는 [[제논 (황제)|제논]] 황제에 이어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등극하여 [[테오도릭 대왕]]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면서 로마 교회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판단하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신들을 통하여 등극 이후 로마 교회로부터 아무런 예우도 받지 못했다고 간접적으로 로마 교회에 전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