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만종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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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만종 사건'''({{llang|it|Vespri siciliani}} {{llang|scn|Vespiri siciliani}})은 [[1282년]] [[부활절]](3월 30일)에 [[시칠리아 왕국]]에서 [[프랑스]] [[앙주 왕조|앙주 가]]의 왕 [[카를로 1세]]에게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이다. 6주에 걸쳐 이어진 반란에서 3천여명의 프랑스인들이 살해당했고, 카를로 1세는 왕국에서 쫓겨났다. 이 사건은 [[아라곤 연합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 사건 개요 ==
 
[[1282년]]의 [[부활절]], 팔레르모의 주민들은 도시 성벽 밖에서 축제를 열고 있었다. 당시에 [[앙주 왕조|앙주 가]]의 왕 [[카를로 1세]]를 대신하여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프랑스인들은 이 축제가 위협적인 사태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하여 군사를 보냈다.
 
 
그 순간, 시칠리아인들에게 봉기를 알리듯, 저녁 기도의 종소리가 팔레르모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봉기의 소식은 시칠리아 전체로 퍼졌고, 곧 전면적인 반란이 일어나 3천 명의 프랑스인이 학살당하고 메시나 항구에서는 프랑스 십자군 함대가 불탔다.
 
 
'시칠리아 만종 반란'이라 알려지게 된 이 봉기는, 시칠리아인들이 아라곤의 왕 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하면서 전쟁으로 번졌다. 카를로 1세는 메시나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도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카를로의 군대는 페드로가 이끄는 아라곤 군대의 습격을 받아, 곧 시칠리아를 포기했다.
 
 
이후 20년 동안, 프랑스의 앙주 왕가 왕들, 그 일가, 교황 세력이 한 편이 되고 아라곤 왕들이 다른 한 편에 서서 벌인 시칠리아 만종 전쟁이 지중해 전역을 휩쓸었다. 이 싸움은 1302년 칼타벨로타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끝이 났다. 조약에 의해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 섬과 남부 이탈리아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고, 후자는 뒤에 [[나폴리 왕국]]이 된다.
 
[[분류:시칠리아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