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민주구국선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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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
1976년 3월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의강조 등을 담고있다.
== 선언배경 ==
76년 1월23일 원주 [[원동성당]] 기도회에서 있은 반유신선언에 자극받고
국민에게 3.1정신을 되새기고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것을 호소하는 선언서
성명서는 문익환의 장남
이우정에게 건네지고, [[명동성당]] 3.1기념 미사가 끝난후 이우정에 의해 낭독되었다.
== 당시정부반응 ==
3월2일
기소된 피고인들 대부분이
그 면면이 화려했기에 법정 안팎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구속자들은 재판장에서 유신체제의 불법성과 민주구국선언의 정당성을 당당히 피력하며 공판자체를 민주주의 강의실로 만들었으며
대한 재판장으로 만들었다. 또한 구속자 부인들은 3.1가족 대책협의회를 결성하여 중앙청,덕수궁,법정앞등에서 짧은 소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사법부에 대한 재판장으로 만들었다.
== 재판결과 ==
고령인 함석헌·정일형과
구속된 인사중 김대중,문익환,윤보선 함석헌이 가장많은 징역5년 자격정지 5년형을 선고 받는데
36년 3개월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열렸다.
"재판장께서 사법부를 대신해 속죄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 36년 3개월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열렸다. 담당판사는 "긴급조치 9호의 위헌성에 대해 말씀드리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라며
▲ 무죄를 선고했다 이미 문익환.김대중.윤보선.정일영.이태영등이 고인이 되었기에 함세웅신부가 최후진술을 했는데, 함신부는
▲ '최후진술'을 통해 "통치권자와 행정·사법부의 모든 분들이 진솔하고 정직하게 사죄해야 한다"며 "재판장께서 사법부를 대신해
▲ 속죄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장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8부 이규진 부장판사는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보상과 위로가
▲ 될 수 없을 것"이라며 "깊은 사죄와 존경의 뜻이 판결에 진실되게 담겨있음을 알아달라"고 고개를 숙였다.
== 사건의 역사적 의미 ==▼
이사건으로 천주교,개신교 종교계와 정치권, 재야 민주화세력이 연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특히 김대중과 문익환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어 김대중과 재야 지식인들을 연결시키는 최초의 고리가 되는 사건이다. ▼
이들 대부분은 이때의 인연으로 4년후 신군부에 의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게 되었으며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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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5 해방의 부푼 희망을 부수어 버린 국토분단의 비극은 이 민족에게 거듭되는 시련을 안겨 주었지만 이 민족은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6.25 동란의 피해를 딛고 일어섰고, [[4.19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 민족은 또다시 독재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삼권분립은 허울만 남과 말았다. 국가안보라는 구실 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 가고 언론의 자유와 학원의 자주성은 압살당하고 말았다. 현정권 아래서 체결된 한․일협정은 이 나라의 경제를 일본 경제에 완전히 예속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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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이북 공산주의 정권과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이 마당에 우리가 길러야 할 힘은 민주 역량이다. 국방력도, 경제력도 길러야 하지만 민주 역량의
뒷받침이 없을 때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그러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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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과 복종을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국민을 위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국민은 복종을 원하지 않고 구체적인 참여를 주장한다.
국민은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할 기본권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민에게서’를 실현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국민들이 정신적,신체적 위협을 받는 일없이 자유로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첫째로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민의 의사가 자유로이 표명될 수 있도록 언론․집회․출판의 자유를 국민에게 돌리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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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국민경제의 수탈을 발판으로 한 수출 산업은 1974년, 1975년 두 해예 40억 달러라는 엄청난 무역적자를 냈고,
그 적자 폭은 앞으로 줄어들 가망이 없다. 1975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외채 총액은 57억 8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차관
난 다음 이 엄청난 빚은 누구의 어깨에 메어질 것인가? 노동자들에게서 노조 조직권과
내맡기고 경제입국의 경륜은 처음부터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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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야말로 우리 5천만 온 겨레가 새 역사 창조에 발벗고 나서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공산주의 틈바구니에서 당한 고생을 살려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세계 만방에 드날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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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만세!
1976년 3월 1일
▲== 사건의 역사적 의미 ==
▲ 이사건으로 천주교,개신교 종교계와 정치권, 재야 민주화세력이 연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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