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민주구국선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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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명동성당]]에서 3.1운동 57주년 기념미사후 낭독된 [[민주구국선언]].
민주주의와[[민주주의]]와 [[긴급조치]] 철폐, 의회정치회복[[의회정치]]회복 사법권독립[[사법권]]독립, 경제입국구상과경제입국 구상과 자세의 재검토, 민주주의[[공산주의]]에 민족통일의강조대한 등을위기감, 담고있다.
[[민주주의]] 민족통일의강조 등을 담고있다.
 
 
== 선언배경 ==
76년 1월23일 원주 [[원동성당]] 기도회에서 있은 반유신선언에 자극받고 원주선언에[[원주선언]]에 참여했던 문익환이[[문익환]]이 중심이 되어 국민에게 3.1정신을 되새기고
국민에게 3.1정신을 되새기고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것을 호소하는 선언서 초안을[[초안]]을 작성하게 된다.
초안을[[문익환]]은 [[초안]]을 가지고 [[수유리]] 안병무의[[안병무]] 집에서 유신통치에[[유신]]통치에 저항하다 해직된 교수 [[이문영]].[[서남동]].[[문동환]].이우정등과의 모임을 주선,[[이우정]]등과의
이우정에게모임을 주선하고 [[이우정]]에게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이태영을[[이태영]]을 여성계 대표로 하여 서명을 부탁한다.
때마침 자택연금중독자적으로 3.1절 선언서를 준비하며준비중이던 이태영의[[김대중]]은 [[이태영]]의 남편이자 국회의원인 정일형에게[[정일형]]에게 서명을 권하고있던 김대중이 이들과 합류하게 되지만,권하다
2월소식을 26일듣고 서명권유이들과 대상자들중에서합류하게 되고, 감옥에서 나온지 얼마안되는 박형규와[[박형규]]와 성서번역임무를 맡고 있던 문익환등은[[문익환]]등을 빼기로한다.제외한
이로서 최종 서명자는 함석헌.윤보선.정일형.김대중.[[김관석]].[[은명기]].[[윤병무]].[[이문영]].[[서남동]].[[문동환]].이우정 등 12명이 최종 서명자가 되었다.
성명서는 문익환의 장남 문호근이[[문호근]]이 필경하여 한빛교회목사[[한빛교회]]목사 이해동이 등사했으며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이[[박용길]]이 붓글씨로 써서 이우정에게 건네 주었다.
이우정에게 건네지고, [[명동성당]] 3.1기념 미사가 끝난후 이우정에 의해 낭독되었다.
 
 
== 당시정부반응 ==
 
3월2일 저녁부터저녁, 중앙정보부에[[중앙정보부]]는 의해[[윤보선]] 전대통령 윤보선을전대통령을 제외한 관련자 20명 전원은전원을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위반혐의로 체포돼체포해 위장안가로위장[[안가]]로 연행되었다연행한다.
기소된 피고인들 대부분이 전직대통령, 대통령후보, 최다선국회의원, 전직대학교수, 종교계지도자등.. 그 유례를 찾기 힘들정도로 화려했기에
그 면면이 화려했기에 법정 안팎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구속자들은 재판장에서 유신체제의 불법성과 민주구국선언의 정당성을 당당히 피력하며 공판자체를 민주주의 강의실로 만들었으며 사법부에
대한 재판장으로 만들었다. 또한 구속자 부인들은 3.1가족 대책협의회를 결성하여 중앙청,덕수궁,법정앞등에서 짧은 소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사법부에 대한 재판장으로 만들었다.
대한 재판장으로 만들었다. 또한 구속자 부인들은 3.1가족 대책협의회를 결성하여 [[중앙청]],[[덕수궁]],법정앞등에서 짧은 소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 재판결과 ==
 
고령인 함석헌·정일형과 , 직접가담자가 아닌 김승훈·장덕필·안충석신부, 여자라는 이유로여성인 이우정등은 [[불구속]] 처리되었다.처리되었고,
결국 김대중·문익환·서남동·이문영·안병무·윤반웅·신현봉·문정현·문동환·함세웅·이해동 등 11명은 구속기소되었다[[구속기소]]되었다.
구속된 인사중 김대중,문익환,윤보선 함석헌이 가장많은 징역5년 자격정지 5년형을 선고 받는데
윤보선.함석헌.정일형은 고령이란 이유로 형집행이 유예되고 결국 김대중 문익환은 77년 3월22일 [[대법원]] 확정되어 복역하게[[복역]]하게 된다.
 
 
36년 3개월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열렸다.
36년 3개월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열렸다. 담당판사는 "긴급조치 9호의 위헌성에 대해 말씀드리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를 선고했다 이미 문익환.김대중.윤보선.정일영.이태영등이 고인이 되었기에 함세웅신부가 최후진술을 했는데, 함신부는
함신부는 '최후진술'을 통해 "통치권자와 행정·사법부의 모든 분들이 진솔하고 정직하게 사죄해야 한다"며 "재판장께서 사법부를 대신해
"재판장께서 사법부를 대신해 속죄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속죄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장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8부 이규진 부장판사는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보상과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라며
될 수 없을 것"이라며 "깊은 사죄와 존경의 뜻이 판결에 진실되게 담겨있음을 알아달라"고 고개를 숙였다.
 
36년 3개월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열렸다. 담당판사는 "긴급조치 9호의 위헌성에 대해 말씀드리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미 문익환.김대중.윤보선.정일영.이태영등이 고인이 되었기에 함세웅신부가 최후진술을 했는데, 함신부는
'최후진술'을 통해 "통치권자와 행정·사법부의 모든 분들이 진솔하고 정직하게 사죄해야 한다"며 "재판장께서 사법부를 대신해
속죄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장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8부 이규진 부장판사는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보상과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라며 "깊은 사죄와 존경의 뜻이 판결에 진실되게 담겨있음을 알아달라"고 고개를 숙였다.
 
 
== 사건의 역사적 의미 ==
 
이사건으로 천주교,개신교 종교계와 정치권, 재야 민주화세력이 연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대중과 문익환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어 김대중과 재야 지식인들을 연결시키는 최초의 고리가 되는 사건이다.
이들 대부분은 이때의 인연으로 4년후 신군부에 의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게 되었으며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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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5 해방의 부푼 희망을 부수어 버린 국토분단의 비극은 이 민족에게 거듭되는 시련을 안겨 주었지만 이 민족은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6.25 동란의 피해를 딛고 일어섰고, [[4.19 학생의거로학생의거]]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습 가슴에 회생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 민족은 또다시 독재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삼권분립은 허울만 남과 말았다. 국가안보라는 구실 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 가고 언론의 자유와 학원의 자주성은 압살당하고 말았다. 현정권 아래서 체결된 한․일협정은 이 나라의 경제를 일본 경제에 완전히 예속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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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민주주의는[[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민주주의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구실로도 민주주의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북 공산주의 정권과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이 마당에 우리가 길러야 할 힘은 민주 역량이다. 국방력도, 경제력도 길러야 하지만 민주 역량의
뒷받침이 없을 때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그러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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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과 복종을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국민을 위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국민은 복종을 원하지 않고 구체적인 참여를 주장한다.
국민은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할 기본권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민에게서’를 실현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유라는[[자유]]라는 국민의 기본권에[[기본권]]에 있다.
국민들이 정신적,신체적 위협을 받는 일없이 자유로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첫째로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긴급조치]]를 곧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되니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
국민의 의사가 자유로이 표명될 수 있도록 언론․집회․출판의 자유를 국민에게 돌리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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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국민경제의 수탈을 발판으로 한 수출 산업은 1974년, 1975년 두 해예 40억 달러라는 엄청난 무역적자를 냈고,
그 적자 폭은 앞으로 줄어들 가망이 없다. 1975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외채 총액은 57억 8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차관 기업드이기업들이 부실 기업으로 도산하고
난 다음 이 엄청난 빚은 누구의 어깨에 메어질 것인가? 노동자들에게서 노조 조직권과 파업권마저[[파업권]]마저 박탈하고 노동자․농민을 차관 기업과 외국 자본의 착취에
내맡기고 경제입국의 경륜은 처음부터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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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야말로 우리 5천만 온 겨레가 새 역사 창조에 발벗고 나서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3․1운동과[[3․1운동]]과 4․19에[[4․19]]에 쳐들었던 아시아의 횃불을 다시 쳐드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공산주의 틈바구니에서 당한 고생을 살려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세계 만방에 드날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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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만세!
1976년 3월 1일
 
 
 
== 사건의 역사적 의미 ==
 
이사건으로 천주교,개신교 종교계와 정치권, 재야 민주화세력이 연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대중과 문익환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어 김대중과 재야 지식인들을 연결시키는 최초의 고리가 되는 사건이다사건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때의 인연으로 4년후 신군부에 의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게 되었으며되었지만,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