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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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리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조선군과 협상을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고, [[송상현 (조선)|송상현]]은 곧 거기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다.
 
결국 전투가 시작되어 [[송상현 (조선)|송상현]]은 [[부산진 전투]] 상황을 보고 받았는지 두꺼운 통나무로 방어책을 만들었으나, 방패가 얇아 조총을 막아주지 못하였다. 조선군이 통나무를 이용한 방어물을 준비했듯이 일본군 역시 성의 공략을 위해 허수아비를 장수처럼 변장시켜 장대 끝에 꽂아 수비군을 유인하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주무기인 활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동래성]] 안에서는 백성들까지 수비에 가담하여 저항하여 한동안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듯하였으나,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문의 인생문(人生門)을 집중공격함으로써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 (조선)|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송상현 (조선)|송상현]]의 부하 조방장 [[홍윤관]]과 [[김희수]], [[대송백]]도 전사하고 그리고 왜군을 보고 도망갔던 양산군수 [[조영규 (조선)|조영규]]와 울산군수 [[이언성]]이 응원차에 달려와 싸웠으나 [[조영규 (조선)|조영규]]는 전사하고 [[이언성]]은 포로가 되어 훗날 [[이덕형]]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일본]]의 지휘관은 [[송상현 (조선)|송상현]]의 용감함에 감탄하고, 그의 사체를 정성스럽게 메워, 그 무덤에는 "충신(忠臣)" 이라고 쓴 목제의 비석을 세웠다.
 
== 결과 및 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