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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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와 최후 ===
[[1663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고, 그해 [[9월]] [[송시열]]을 변호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1665년([[현종]] 6)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번째첫 번째 [[원자]]보양관이 되었으나 2차 예송논쟁으로 사퇴하였다. 이후 김집, 송시열, 윤선거 등과 강독하고 토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송준길은 [[윤선거]]의 사람됨을 아깝게 여겨 그를 계속 관직에 추천했으나, [[윤선거]]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또 [[윤선거]]와 [[송시열]]의 사이를 화해시키려 여러번 노력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윤선거]]는 죽기 직전까지도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을 결코 꺾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의 아들에게 내려진 벼슬까지 거두어줄 것을 간청했다.<ref name="balchik0207">정구선,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207페이지</ref> [[1669년]](현종 10년) [[4월]] [[윤선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윤선거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라고 애석해했다. 또한 [[참찬]] [[송준길]]은 "사우(스승과 동료)간에 윤선거를 엄탄지신(嚴憚之臣)이 될만 하다고 했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으니, 정말 국가의 불행입니다."하고 탄식했다.<ref name="balchik0207"/> [[윤선거]] 사후 그에게는 [[이조]][[참의]]가 [[추증]]되었다.<ref name="balchik0207"/> 그에 대한 추증은 당시 [[의정부]][[좌참찬]] 송준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는데, 송준길이 아뢴 바를 보면 "윤선거는 국가에서 예우하던 신하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사우들이 모두 애석해합니다. 윤선거가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여 소장(梳章)에까지 한번도 직함을 쓰지 않은 것은 성상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사후 명정(銘旌)에도 '성균 생원'이라 썼다 하니, 그 예우하는 도리로 [[증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했다.<ref name="balchik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