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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글 →‎초기 언론 활동: 사전에 등재된 단어 몇을 빼고는 ‘여럿의 가운데’의 뜻이든 ‘무엇을 하는 동안’의 뜻이든 ‘중’은 명사이므로 그 앞을 띄어 쓴다. using AW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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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1981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었으며, [[1995년]] 삼성언론재단의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1996년]]부터 한일역사공동연구 운영대표로 역임하였다.
 
한편 [[노태우 정부]] 시절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다.{{출처}}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40분쯤 [[한국외국어대학교|외국어대]] 재학중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 자신은 머리를 다친 후로 감시를 당한 기억이 없었다고 한다.<ref name="인권1">[http://www.cathrights.or.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1 보안사, 저명인사 1300명 사찰] 천주교인권위 1990년 10월 5일자</ref> [[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했다.<ref name="인권1"/>
 
==== 2000년대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