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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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년]] [[6월 13일]] 15세에 잉글랜드 [[켄트 주]] [[캔터베리]]에 있는 성 오거스틴 교회에서 24세의 잉글랜드 왕 [[찰스 1세]]와 혼인했으나 [[가톨릭|로마 가톨릭 교회]] 국가인 프랑스의 왕실에서 태어나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던 헨리에타 마리아는 종교상 이유로 영국 국교인 [[영국 성공회|성공회]]<ref>흔히 [[성공회]]를 영국 국교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세계성공회공동체에서 영국 국교는 영국 성공회뿐이고 기타 성공회 교회는 자치하는 관구 교회이다</ref>의 방식으로 치러지는 영국의 대관식은 치르지 않았다.
 
혼인 초 두 사람은 종교, 성격, 왕의 총신인 [[제1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빌리어즈|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의 이간질로 몹시 냉정했으며, 헨리에타 마리아는 프랑스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 수행원들을 지나치게 많이 데려와 그 사람들의 막대한 체류비를 [[찰스 1세]]가 부담하게 한 이유로 결국 [[찰스 1세]]가 자신의 비(妃)인 헨리에타 마리아를 돕는 [[가톨릭|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와 시녀 이 명을 제외하고 그 사람들 대부분을 모조리 돌려보내면서 관계는 더욱 악화했으며, 새 왕국에 정을 붙이지 못한 헨리에타 마리아가 모국인 [[프랑스]]를 향한 창가 주변을 자주 서성이는 장면이 목격되자 격노한 [[찰스 1세]]는 헨리에타 마리아를 의도로 멀리하면서 그 여자와 이혼하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딸 안나 마리아(Infanta Maria Anna)와 재혼하려고 계획하기도 한 시도는 결국 실패했으나 이후에도 부부는 만날 때마다 서로 싸우고 반목하면서 몇 주간 만나지 않았고 얼굴을 재대면하면 참지 못하고 서로 공격하곤 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남편 곁에서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게끔 늘 유도하는 버킹엄 공작을 몹시 싫어했다.
 
버킹엄 공작이 [[1628년]] 암살당하자 부부 관계는 대개선됐고 정략 결혼한 당대 부부 간에서는 보기 드물게 화목한 정도로까지 발전됐으나 [[캔터베리 대주교]]인 윌리엄 로드나 스태포드 백작 [[토머스 웬트워스]]와 같은 영국 내의 실력자들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을 가진 헨리에타 마리아가 남편인 왕과 사이가 좋아지고 점차 커지는 영향력을 못내 아쉬워하며 경계했다. 그 사람들이 걱정하던 대로 아내에게 감화한 찰스1세는 예전과 달리 [[가톨릭|로마 가톨릭 교회]]도 친밀하게 느겼고 더 친프랑스다운 시각을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