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 (밴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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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중학교 시절부터 소꿉친구인 [[데이먼 알반]]과 [[그레이엄 콕슨]]은 1988년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알렉스 제임스]]를 만난다. [[데이먼 알반]]은 그 해 10월, 드러머인 [[데이브 로운트리]]와 서커스(Circus)라는 이름의 인디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서커스의 기타리스트가 밴드를 떠나고 난 뒤 [[그레이엄 콕슨]]이 합류하게 되었고, 이 계기로 밴드의 질은 비약적으로 향상 된다. 그 해 12월 데이브가 서커스의 두 멤버들을 탈퇴시킨 것을 계기로, [[알렉스 제임스]]가 베이시스트로 합류하게 되면서 총 4명의 밴드로 재편성 하게 된다. 1988년 12월, 멤버들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D.Salinger)작의 소설인 [[호밀밭의 파수꾼]] (Seymour: An Introduction)에서 따와 밴드 이름을 시모어 (Seymour)라고 짓는다. 1989년 여름, 이 그룹은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을 갖는다. 그 해 11월, 푸드레코드(Food Records' A&R)의 대표 앤디 로스 (Andy Ross)는 시모어의 공연을 본 뒤 그의 레이블과의 계약을 제안한다. 하지만 로스와 푸드레코드는 그들의 밴드명에 불만을 갖고 대체 그룹명들이 적힌 리스트를 작성하여 새 그룹명을 짓기를 제안했다. 멤버들은 그 중 '블러 (Blur)'를 그룹명으로 결정하였고 1990년 3월, 푸드레코드는 새 이름을 얻게 된 밴드인 '블러'와 계약을 하게 된다.
 
1990년 3월에서 7월까지 블러는 [[크램프스]]의 오프닝밴드로서 영국 전역을 투어하며 새로운 곡들에 대한 반응을 테스트 한다. 1990년 10월, 블러는 투어가 끝난 뒤 〈She's So High〉라는 싱글을 발표하는데 영국 싱글차트에 48위에 랭크 된다. 하지만 밴드는 후속싱글 제작을 하며 문제에 부딪혔고, 프로듀서인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와 함께 제작하기 시작했을때서야 제대로 된 곡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발매된 두번째두 번째 싱글인 〈There's No Other Way〉는 최고 8위까지 찍으며 히트하게 된다. 블러는 〈She's So High〉 싱글의 성공으로 팝 스타가 되었고, 런던에 위치한 The Syndrome club의 공연 밴드로서 자주 초청되었다. 1991년, 당시 NME 매거진은 블러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블러는 맨체스터 록그룹들이 생명을 다하기 시작한 후로 등장한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미소년 밴드들 중 하나다."
 
세번째세 번째 싱글인 〈Bang〉은 겨우 24위에 랭크되며 실망스러운 성적을 낳는다. 그럼에도 앤디 로스와 푸드레코드의 사장인 데이비드 밸프는 블러의 최선책이 계속해서 매드체스터 장르를 하는 것이라고 확신을 한다. 블러는 음악적 역량을 넓히기 위한 시도를 하려했지만, 그룹의 데뷔 앨범 녹음 당시 알반이 그 스튜디오에서 가사를 써야 했기때문에 그 시도는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첫 번째 앨범인 《[[Leisure]]》 (1991)은 영국 음반 차트에서 7위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저널리스트 존 해리스(John Harris)는 "용두사미의 냄새를 지울 수가 없다." 고 《[[Leisure]]》를 평하는 등 평단에서 엇갈린 평을 받게 된다.
 
=== 브릿팝의 시대 : 1992-95 ===
1992년 3 월, [[지저스 앤 메리체인]] 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등이 출연하는 대규모 공연 순회인 '롤러코스터 투어'에 오프닝 그룹으로 참여하게 되지만, 그 것 전후로 매니저가 밴드의 자금을 횡령하여 은행계좌에 6만 파운드의 빚이 있는 것을 알게된다. 파산은 어떻게든 모면했지만, 도움을 준 T셔츠 회사의 의향에 따라 6만 파운드의 빚을 갚기 위해 미국투어를 결정하게 된다. 그들은 싱글인 〈PopScene〉을 발매하는 동시에 투어를 시작한다. 음악적 특징으로는 "빠르고 세찬 펑크록 기타반주, 60년대 팝 스타일의 후렴구, 요란한 영국 호른, 통제되는 맹렬함, 그리고 현대적이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PopScene〉은 블러 음악의 전환점이 된다. 하지만 이 싱글은 발매 후 겨우 UK차트 32위에 머물게 되는데, [[데이먼 알반]]의 1993년 NME 인터뷰에서 "우리는 〈PopScene〉에서 큰 변화를 느꼈어요. 매우 매우 영국적인 음반으로 말이죠."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건 많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했죠...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지지없이 영국적인 이상향을 밀고나갔지만 아무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죠." 결과적으로 이 싱글이 빛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 "Never Clever"의 이름의 싱글 발매 계획은 휴지조각이 되었으며 블러의 두번째두 번째 앨범 작업은 미뤄졌다.
 
두 달간 휴일도 없는 미국 투어동안, 블러는 종종 서로에게 좌절감을 터트렸고, 몇몇의 물리적인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점점 불행해져갔다. 미국 투어 전후로 멤버들이 알콜 중독을 앓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고, 어떤 라이브에서는 음주 상태로 최저의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멤버들은 향수병을 앓았다. [[데이먼 알반]]은 그 당시를 회고하며 "정말 사소한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영국에 대한 모든 것이 그리웠고, 그래서 영국적인 분위기의 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했죠." 라고 이야기했다. 그룹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블러는 (특히, [[데이먼 알반]]은) 자신들이 떠나의 있는 동안 라이벌 그룹이었던 [[스웨이드]]의 성공적인 성과에 감정이 상한다. 1992년, 같은 과정을 거친 [[스웨이드 (밴드)|스웨이드]]의 성공과 대비되는 시시한 성과 후 블러는 푸드레코드와의 계약 파기의 위험까지 닥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블러는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겪었고, [[너바나]]와 같이 당시 인기있던 미국 그런지록 그룹들과 대비되는 영국 전통 록그룹을 바탕으로 하는 그룹으로 이미지 변화를 꾀 할 생각이었다. 비록 [[데이먼 알반]]의 대한 새로운 선언에는 회의적이었지만, 푸드레코드의 사장인 데이비드 밸프는 밴드의 선택대로 XTC의 앤디 파트리지가 후속 앨범을 제작하는 것에 찬성을 했다. 하지만 앤디 파트리지의 작업 성과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서, 〈There's No Other Way〉를 히트시킨 [[스티븐 스트리트]]가 그룹의 프로듀스를 하기 위해 돌아왔고 블러는 그와 다시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