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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대학교 학생 운동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1988년]]에는 CA 그룹 학생회장 후보 선거운동본부 조직국장, [[혁명적 노동자 계급투쟁동맹]](혁노맹)의 전신인 “혁명의 불꽃” 그룹 선동국장을 맡기도 했다. [[경기도]] 소래 ‘작은자리’에서 일주일간 개최된 혁노맹 결성대회에 참가하고 있던 [[1989년]] [[8월 19일]] 아버지가 죽었다.<ref name=ma>{{저널 인용|저자=정희상 |날짜=1990-11 |제목=분단조국 그리고 윤석양의 삶 |저널=월간 말 |권= |호=11월 |issn= |url= |형식=월간지 |확인날짜=2012-09-07 }}</ref>
 
운동권 생활에 지쳐가던 중 [[1990년]] [[5월 1일]] [[대한민국]]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육군 제3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6주간 훈련을 받고 [[1990년]] [[6월 20일]] [[강원도]] [[철원]]의 자대에 배치받아 소대원으로 복무하던 중 [[7월 3일]] 연대 인사과장에게 불려간다. 대공상담소라고 적힌 보안부대에 가서 이승섭 계장과 김효수 반장에게 혁노맹 활동과 다른 조직원의 신상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이후 서울 서빙고 분실로 옮겨 [[7월 5일]]부터 이승섭 계장과 이덕렬 부장, 김효수 반장 등에게 이상재, 정헌, 임찬수 등 군투입자와 중앙위원 거주지 계속 심문을 받았다. 대학교 앞에서 현장 활동을 거쳐 [[보안사령부]] 편에서 일하기로 신임을 얻고 [[8월 22일]]에는 장자동 보안사령부로 이동했다. 다시 서빙고 분실로 와서 보안사령부 대공처 수사3과 분석반에서 김용성 과장, 이승섭 계장, 이덕렬 부장, 박대호, 조재은과 함께 근무하던 중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1,303명의 민간인 사찰 카드와 컴퓨터 디스켓 3통 등을 가방에 넣어 [[9월 23일]] 새벽에 보안사를보안사령부를 탈출했다.<ref> {{저널 인용|저자=정희상 |날짜=1990-11 |제목=나에겐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다|저널=월간 말 |권= |호=11월 |issn= |url= |형식=월간지 |확인날짜=2012-09-07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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