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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춘추 시대|춘추]] 초기, 노나라는 동방의 강국으로, [[노 은공|은공]], [[노 환공|환공]] 시대([[기원전 722년]] ~ [[기원전 694년]]) 여러 번 제, [[송 (춘추 전국)|송]] 등의 나라와 싸워 이겼고, 또 기, 거와 같은 소국에 부단히 침공했다. 춘추시대 중기, [[사회]]가 변혁하여, 정권은 귀족 대신의 수중에 들어갔다. 장기간 실권을 장악한 주요는 [[노장공]]의 세 아우 계우, 숙아, 경보의 자손으로,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 삼가라 했다(혹은 저희가 모두 노환공의 후예이므로, [[삼환]]이라 했다). 곧 소위 '정재대부'다. 노나라는 서주의 예법과 제도를 비교적 잘 보존한 나라 중 하나로, 다만 당시 형세의 영향으로, 일련의 변혁활동을 전개했다. [[노선공노 선공|선공]] 15년([[기원전 594년]]) '처음으로 무에 징세했다', [[노성공]] 원년([[기원전 590년]]) '구갑을 두었다', [[노애공노 애공|애공]] 12년([[기원전 483년]]) '전부를 썼다', 노나라 조세 부역 제도의 중요 개혁이다. [[노양공노 양공 (오)|양공]] 11년([[기원전 562년]]) '삼군을 두었다', [[노소공]] 5년([[기원전 537년]]) '중군을 버렸다', 노국 군사조직과 군신역량 비교의 변동 과정이다.
 
춘추 말기, 노소공이 삼가에게 쫓겨나, 객사하였다. 이후 오래지 않아, 삼가의 가신 [[양호]] 등이 국정을 전제하여, 한때 '배신이 국명을 쥐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노정공]] 시대([[기원전 509년]] ~ [[기원전 495년]]), 양호 등은 실패하여 출분하고, 삼환이 다시 새로이 정권을 장악하여, 후의 [[노애공노 애공|애공]]([[기원전 494년]] ~ [[기원전 468년]] 재위)은 군권 회복을 도모하여 삼가 대신들과 충돌이 극해져 마침내 [[월나라]]로 망명해 죽었다. [[전국시대]] 초기, 약 [[노원공노 원공|원공]] 시대([[기원전 436년]] ~ [[기원전 416년]]), 삼환은 점차 세력을 잃고 쫓겨나, [[노목공노 목공|목공]]([[기원전 415년]] ~ [[기원전 383년]]) 이후, 정권은 다시 국군의 손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전국시대 힘이 이미 쇠약해, 자주 제나라의 작전에 함께했다. 전국 말년, [[초나라]]가 [[진나라]]의 핍박을 받아 동천하면서, 노나라를 공벌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256년]], 초나라는 노나라를 병탄하고, [[노경공노 경공 (수)|경공]]을 폐출하니, 노나라는 멸망했다. 한 평제 시기, 노경공의경공의 8세손 공자 관을 포로후로 봉하고, 주공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공자관이 죽자 시호를 '절'이라 하고, 그 아들 공손상여가 습작하게 했다. [[왕망]]이 [[신나라|신 왕조]]를 세우고, 또 공손상여의 후예 희취를 포로자로 봉했다.
 
== 역대 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