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세베리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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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세베리노는 [[로마]] 태생으로 아비에누스의 아들이라고 한다. 부친의 이름으로 보건대 [[로마 원로원]] 의원의 후손으로 추정된다.<ref name="PLRE">Martindale, Jones & Morris (1992), p. 155</ref> 아비에누스는 501년 로마의 [[콘술]]을 재임하였다.<ref>Martindale, John R., "Fl. Avienus iunior 3", ''Prosopography of the Later Roman Empire'', Volume 2,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pp. 577–581</ref>
세베리노는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선종한 지 사흘 만에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638년 10월 세베리노는 자신의 교황 선출에 대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승인을 받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단을 보냈다. 하지만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세베리노가 [[단의설]]의 신앙고백인 《에크테시스》(Ecthesis)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교황 선출을 인준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교황의 사절단은 《에크테시스》에 서명해주면 교황 선출을 인준해주겠다는 헤라클리우스의 요구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1세]]는 죽기 전에 단의설을 비판한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오]]의 서신에 대한 대답으로 《에크테시스》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헤라클리우스 황제로 하여금 648년 12월 《에크테시스》를 칙령으로 발표하여 동로마 제국 전역에 널리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에우스타키우스를 군 사령관(magister militum)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에크테시스》에 대한 교황의 승인을 받아내라는 명령을 내린 후에 라벤나 총독부로 보냈다.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이미 나이가 많았고 관대하였으며 성직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였다고 전해진다. [[동로마 제국]]의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황제]]는 친단성론파 저서인 에크테시스를 공포하여 이를 인정하게 하고는 주교 성성을 허락하였다. 세베리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2개월 만에 선종하였다. 세베리노가 에크테시스를 거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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