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세베리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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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1세]]는 죽기 전에 단의설을 비판한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오]]의 서신에 대한 대답으로 《에크테시스》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헤라클리우스 황제로 하여금 648년 12월 《에크테시스》를 칙령으로 발표하여 동로마 제국 전역에 널리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군 사령관(magister militum) 에우스타키우스에게 《에크테시스》에 대한 교황의 승인을 받아내라는 특명을 내린 후에 그를 [[라벤나 총독]] [[이사아키우스 (총독)|이사아키우스]]에게 보냈다.
 
그러나 세베리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의 의지(意志)를 가지고 있다는 단의설의 주장이 담긴 《에크테시스》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라벤나 총독 이사아키우스는 황제의 뜻에 따라 세베리노의 교황 선출을 인가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18개월 넘게 지속되었다. 그동안 이사아키우스는 황제로부터 받은 명령을 달성시키고자 수석비서관(chartoularios) 마우리키우스에게 교황의 관저인 [[라테라노 궁전]]을 약탈하여 강제로라도 그가 에크테시스에 동의하게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마우리키우스는 교황에게 불만을 품은 지역 귀족들을 끌어들여 지역 로마군 병사들에게 접근하였다. 마우리키우스와 그와 동참한 지역 귀족들은 병사들에게 교황이 그들에게 급료를 제대로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선동하였다. 그리하여 성난 그들은 폭도로 돌변하여 라테라노 궁전을 향해 들이닥쳤다.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이미 나이가 많았고 관대하였으며 성직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였다고 전해진다. [[동로마 제국]]의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황제]]는 친단성론파 저서인 에크테시스를 공포하여 이를 인정하게 하고는 주교 성성을 허락하였다. 세베리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2개월 만에 선종하였다. 세베리노가 에크테시스를 거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