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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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4세는 [[달마티아]] 태생으로 아마도 [[살로나]]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부친은 [[라벤나 총독]]의 참사원 스콜라스티쿠스 베난티우스이다. 출생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ref name="Pope John IV"/> 교황으로 선출된 당시 그는 로마 교회의 [[수석부제]]로서 로마 교구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의 착좌식은 640년 12월 24일에 거행되었으며, 라벤나 총독이 [[동로마 제국]] 황제의 대행으로서 이를 승인하였다.
 
요한 4세는 자신의 고향 달마티아가 [[슬라브족]]의 침략으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아빠스 마르티노로 하여금 거액의 돈과 함께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에 보내 슬라브족에게 포로로 사로잡힌 달마티아인들을 석방시키도록 하였다. 또한 이미 달마티아의 많은 성당이 슬라브족에 의해 파괴되어 재건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곳에 모셔진 몇몇 달마티아 [[성인 (종교)|성인]]들의 유해 및 유물을 로마로 가져오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로마로 가져온 달마티아 성인들의 유해 및 유물을 모시기 위해 작은 경당을 세웠는데, 그 경당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경당이 완공되자 요한 4세는 그곳 경당의 모형을 손에 든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한 모자이크로 장식하였다. 요한 4세는 또한 달마티아를 침략한 슬라브족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콘스탄티누스 7세|콘스탄티누스 포르피로게니투스]]에 따르면, [[크로아티아의 포르가|달마티아-크로아티아 공작 포르가]]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부름을 받아 달마티아에 파견된 기독교 교사들과교리교사들과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헤라클리우스는 요한 4세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는 [[발칸 반도]]에서 [[슬라브 민족]]의 포로가 되었던 [[기독교]] 신자들을 구출하였으며 라테란 세례대에 유해를 모신 경당을 건축하고 [[영국]]에서 펠라지아니즘을 추방하고 니산달 14일에 지키던 [[부활절]] 관습을 폐지시켰다. [[641년]] 초에 지방 [[공의회]]를 열어 [[단성론]]을 단죄하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피로스에게 알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단일 의지가 있다고 선포한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 황제]] [[헤라클리우스]]의 〈진술〉(에크테시스, ''Ekthesis'')를 거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3세]]에게 서신을 보내어 [[교황 호노리오 1세]]의 정통성을 다시 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