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아센 (토론 | 기여)
아센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33번째 줄: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보두앵 1세]]는 황제를 선언하였고 칼로얀의 연합 제의를 거절하였던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과 그 이웃 국가들을 정복할 의도를 드러내었다. 이에 [[트라키아]]의 비잔티움 귀족들이 반발하여 침략자들에게 대항하는 한편 [[1205년]] 칼로얀에게 복종을 약속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라틴 제국의 황제 보두앵 1세는 비잔티움 도시들을 점령하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하였다. 십자군의 연대기 작가였던 [[빌라르두엥]]는 ''"왈라키아의 왕 요안니차는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구원하려 왔다. 왈라키아인과 불가리아인, 개종하지 않은 14,000명의 쿠만족들이 그를 따랐다."''<ref>Villehardouin, 92</ref>라고 적었다. [[1205년]] 4월 14일, 칼로얀의 쿠만족 부대는 십자군의 [[중장기병]]을 아군이 매복해 있던 아드리아노폴리스 북쪽의 습지로 유인하였고, 그곳에서 칼로얀은 그들에게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큰 타격을 가하였다.]] 보두앵 1세는 포로로 잡혔고 태자 [[루이 1세]]는 살해당하였다. 보두앵은 터르노보의 감옥에 투옥되어 그곳에서 죽었거나 혹은 이후에 [[1205년]] 처형당하였다. 같은 해인 [[1205년]] 칼로얀은 세레스에서 라틴 군을 섬멸하고 [[플로프디프]]를 점령하였고, 라틴 제국 하의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처음에 칼로얀의 승리를 환영하였던 비잔티움 귀족들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칼로얀은 진로를 바꾸어 비잔티움인들을 공격하였고, 바실레이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불가르인의 학살자)에서 유래된 '로마녹토노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206년]] 1월 31일 칼로얀은 루시온 전투에서 라틴 군을 격파하였고, [[디모티키아]]를 점령하러 나섰다. 불가리아는 다시 한번 헤라클레이아와 카에노프루리온과 같은 주요 도시를 포함하여 트라키아를 유린하였고, 로도스토와 같은 도시의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이전의 칼로얀의 잔혹함은 그의 적들을 뛰어 넘지 않았던 반면 후기에는 점령한 도시의 주민들을 불가리아의 먼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42번째 줄:
칼로얀은 아드리아노폴리스를 다시 포위하였지만 쿠만족 기병대의 철수와 라틴 제국의 새로운 황제인 보두앵 1세의 동생 앙리의 진군으로 인해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하였다. [[1207년]] 칼로얀은 비잔티움 저항 세력 중 가장 강력했던 [[니카이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1세]]와 반 라틴 동맹을 맺었다. 같은 해 9월 4일 칼로얀의 군대는 테살로니키 왕국의 십자군 통치자 보니파키오 몽트페라트를 죽였다. 칼로얀은 다시 한번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하였으나, [[1207년]] 10월 초 그는 그의 쿠만족 동맹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칼로얀의 치세 대부분은 외국(비잔티움 제국과 라틴 제국)과 대립과 관련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의 잔인함이 드러났다. 몇몇 그의 무자비함은 그의 쿠만족 동맹군이 벌인 일이었고, 칼로얀의 억압 정책은 적의 지배층을 노린 것이었고 평민들은 자비롭게 대해졌다. 보두앵 1세의 죽음과 관련된 전설에서는 그의 아내가 보두앵이 그에게 청혼했었다고 거짓으로 주장하자 분노한 칼로얀이 그의 시신을 훼손하였다고 묘사한다. 칼로얀의 시체는 그의 도장이 새겨진 반지와 함께<ref>http://www.rightnotprivilege.org/layout/home/tsar.jpg</ref> 터르노보의 성 40 순교자 성당에 묻혀져있던 것이 발견되었다.
 
== 가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