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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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 [[8월]] [[이기 (1476년)|이기]] 등의 탄핵으로 유배령을 받고 남해로 유배가던 중 [[8월 28일]] 사사령(賜死令)이 떨어진다. [[8월 30일]] 배소로 가던 중 [[충청북도]] [[충주시|충주]]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58세였다. 당시 성인이던 그의 아들 흥인(興仁)·흥의(興義)·흥례(興禮) 등 3명도 함께 사형당하였다. 장남 [[윤흥인]]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랑, 첨정을 지냈고, 윤흥의는 [[생원]]이었으며 윤흥례는 당시 [[선공감]]감역이었다.
 
그의 다른 누이는 [[계성군]]([[조선 성종|성종]]의 서자)의 양자가 된 [[계림군]]의 생모로, 이 인연으로 그가 [[계림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들 중 [[윤흥신]]과, 장남 [[윤흥신]]의 세 아들만은 유모와 하인들에 의해 화를 피할수피할 수 있었다. 이때 기적적으로 피신한 아들들 중 [[윤흥신]]은 후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을사사화]]와 [[중종]], [[명종]]조의 권신들의 권력농단에 대해 그에게도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란이 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은 "사직(社稷)에 대한 죄가 없지 않다"며 역시 비판하였으나, [[이이]](李珥)는 "임은 죄가 없다"고 하여 평가가 엇갈리기도 했다. 바로 [[고양군]] 남면 항동 손좌건향의 언덕에 매장된 본부인 여흥이씨의 시신과 함께 합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