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핀 캠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S0ch1 (토론 | 기여)
잔글 HotCat을 사용해서 분류:대학 설립자을(를) 삭제함
Yjs5497 bot (토론 | 기여)
잔글 →‎출국과 재입국, 최후: 맞춤법 교정. 사용자:yjs5497_bot의 맞춤법 교정목록을 참조하세요 using AWB
29번째 줄:
 
=== 출국과 재입국, 최후 ===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1919년]] 되돌아오려고 비용 마련을 위해 노동과 아르바이트 등에 종사하였고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돌아오려 준비하던 중 과로로 신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의 친지들은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하라고 권유했으나 사업을 중단할수중단할 수 없다며 병이 낫지 않았는데도 퇴원,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변변한 병원하나 존재하지 않았고, [[1920년]] [[11월 12일]] [[경성부]] 종로정 고간동(종로구 고간동, 현 내자동)에서 별세했다. 향년 67세였다.
 
장례식은 1920년 11월 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되었고, [[윤치호]], [[이상재]], [[김성수 (1891년)|김성수]], [[송진우]] 등 조선인 지도자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배웅하였다. [[경성부]] 양화진 제1묘역 나-7호에 안장되었으며 비문에는 그가 생전에 남긴 말 중 한마디인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가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