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우드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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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 시절 ===
[[1461년]] 존 그레이 경이 세인트 올번스 전투(Second Battle of St Albans)에서 [[랭커스터 왕가]]의 편에 서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후 [[요크 왕가]]의 [[에드워드 4세]]와 비밀리에 결혼하였다. 비밀 결혼이었기에 정확한 결혼 날짜와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1464년]] [[5월 1일]] 우드빌 가문의 노샘프턴셔 영지에서 치뤄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ref>결혼의 증인은 신부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와 두 명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Robert Fabian, The New Chronicles of England and France, Henry Ellis, 1811.</ref> 이듬해인 [[1465년]] [[5월 26일]] 일요일에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1466년]] [[2월 11일]] 첫 자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것을 시작으로 두 부부는 10명의 자녀를 얻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왕비 등극은 즉각 [[영국]] 정계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왕비가 되기에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신분이 지나치게 낮다는 점과<ref>[[추밀원]]에서는 그들의 결혼에 대해 '그([[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그와 같은 군주에게 걸맞는 여인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ref> [[랭커스터 왕가]]의 지지파였다는 점이 주효 원인이었다. 특히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6세]]의 폐위와 [[요크 왕가]]의 [[에드워드 4세]]의 즉위에 큰 공을 세운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반발은 격렬했고, 워릭 백작이 [[에드워드 4세]]를 버리고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자 자신의 사위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을 새 왕위 계승자로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의에 실패한 워릭 백작은 클래런스 공작과 일가족을 이끌고 [[프랑스]]에 망명하였으며, [[헨리 6세]]의 폐위 이후 친정인 프랑스로 건너가 망명 중이었던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거릿]]과 결탁하여 랭커스터 파로 변절하였다. [[1470년]] [[영국]]으로 되돌아온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6세]]를 복위시켰으나 [[1471년]] 바넷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같은 해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랭커스터 왕가]]의 적통 후계자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마저 전사하면서 랭커스터 파 세력은 몰락하였으며 [[에드워드 4세]]가 다시 복위하였다. 이 때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소(聖所)에 피신해 있던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1470년]] [[11월 2일]] [[에드워드 4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 5세]]를 얻었다.
 
=== 미망인 시절 ===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