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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윤은 절개가 있었기에 곽태(郭泰)는 왕윤을 두고 왕을 보좌할 재목으로 평가했다. [[155년]](또는 [[166년]]) 당시 왕윤은 태원(太原)의 관리였는데, 같은 태원 출신인 소황문(小黃門) 조진(趙津)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걸 우선시하고 마구 횡포를 부려 태원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왕윤은 평원 출신인 태원태수(太原太守) 유질(劉瓆)의 명령을 받고 조진을 잡아들였다. 조진은 유질에 의해 처형당하였고, 이 때문에 원한을 품은 조진의 형제가 환관들을 통해 모함했기 때문에 유질은 감옥에 갇혔다가 죽었다. 왕윤은 유질의 유해를 평원으로 보내고 삼년상을 마친 다음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다<ref>《후한서》왕윤전에는 이 일이 왕윤의 나이 열아홉일 때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에는 166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왕윤의 나이는 서른이므로 11년의 차이가 생긴다.</ref><ref>《후한서》 효환제기에 따르면, [[연희 (후한)|연희]](延熙) 9년([[166년]]) 9월에 남양태수(南陽太守) 성진(成瑨)과 유질(劉質)이 참언을 받아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졌다고 한다. 《후한서》 권30 열전 제20의 양해전에서는 남양태수 성진과 태원태수 유질(劉瓆)이 함께 주륙되었다고 하며, 또 [[사승]](謝承)의 《후한서》에 유질(劉瓆)은 평원군 사람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유질(劉質)은 왕윤의 상관 유질(劉瓆)과 동일인물인 것 같다.</ref>.
 
유질의 뒤를 이어 태수가 된 왕구(王球)가 전혀 훌륭한 면모가 없는 노불(路佛)이란 사람을 등용하려고 하자 왕윤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화가 난 왕구는 왕윤을 죽이려 했으나, 이 사실을 안 병주자사(幷州刺史) 등성(鄧盛)<ref>자는 백능(伯能)이다. (후한서 영제기)</ref>이 왕구를 저지하고 왕윤을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삼았다 이 일로 인해 왕윤의 명성이 높아졌다.
 
[[광화 (후한)|광화]](光和) 7년([[184년]]) 당시 왕윤은 예주자사(豫州刺史)였다.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던 왕윤은 자신이 무찌른 황건적에게서 [[장양 (후한)|장양]](張讓)이 보낸 편지를 발견하고 조정에 바쳤다. [[후한 영제|영제]](靈帝)는 노여워하였으나 장양이 간곡히 비는 것을 보고 화를 풀어 벌을 내리지 않았다. 앙심을 품은 장양은 얼마 가지 않아 왕윤을 모함하였고, 왕윤은 조정으로 불려와 처형당하게 되었다. 태위(大尉) 양사(楊賜)는 장양에게 치욕을 당하기 전에 자결하는 것을 권했으며, 예주의 부하 중에서도 자결하는데 쓸 독약을 건네 주는 이가 있었다. 왕윤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그대로 가려 했다. 그러나 대장군 [[하진]](何進) 등이 왕윤의 구명을 위해 애쓴 결과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