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의 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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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을 받자 [[윤휴]]는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쓰면 될 것이지 죽일 필요까지 있는가"라고 항변했다. [[윤선도]](尹善道)에게 사후 내려진 [[증직]]과 [[시호]]도 함께 추탈당하였다.
 
[[허목]]은 [[1675년]](숙종 즉위년) 숙종의 즉위 초 [[송시열]]에게 사형을 구형해야 된다며 [[송시열]]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송시열]]이 효종을 가짜 왕으로 생각하고 1년복을 주장하였다. 이때 [[서인]]은 그의 발언 중 '[[송시열]]이 효종을 가짜왕으로 생각했다'는 구절은 효종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허목]]은 사형은 모면하였지만, 죄인으로 몰려 삭탈관직되고 문외출송령이 떨어져 도성에서 추방되었다. 도성에서 추방된 [[허목]]은 [[경기도]] [[연천군]]에 체류하다가 2년만에2년 만에 죽는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숙종]]은 환국을 단행한다.([[경신환국]])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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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이지만 국왕의 외할아버지의 첩이고, 대왕대비의 서모인 이를 구타하였다는 점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숙종은 허견의 고신을 강등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해두고 있었다.
 
또한 [[김우명]]에 의해 복창군, 복평군 등의 역모 고변이 있었으나 [[김우명]]의 무고로 밝혀지면서 조야는 김우명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나왔고, [[김우명]]의 처벌이 확실시되자 대비 [[명성왕후]]가 정청에 나타나 통곡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윤휴]]는 여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며안 된다며 왕에게 대비를 조관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대비를 조관하라는 발언에 숙종의 비위가 상하게 된다.
 
허견과 윤휴에 대한 왕의 미움 역시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