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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Battle on Kosovo1389.jpg
|그림크기=300px
|설명=아담 스테파노빅의스테파노비치의 "코소보 전투" [[유화]](1870년작)
|날짜=[[1389년]] [[6월 15일]]
|장소=[[가지메스탄|세르비아의 코소보 평원]]
|교전국2=[[파일:Grb Lazarevic.jpg|25px]][[세르비아 왕국|세르비아]]<br />[[파일:Grb kosaca.gif|25px]][[보스니아 왕국|보스니아]]
|지휘관1=[[무라드 1세]]†,<br />[[바예지드 1세]],<br />[[야쿠브]]†
|지휘관2=[[라자르 헤레베자노빅흐레벨랴노비치]]†,<br />[[불크부크 브란코빅브란코비치]]<br />[[빌라코 부코빅부코비치]]
|병력1=~27,000명-40,000명<ref name=Sedlar/><ref name=Cox/><ref name=Cowley/><br />
|병력2=~12,000명-30,000명<ref name=Sedlar>{{cite book | last = Sedlar | first = Jean W. | 제목 = East Central Europe in the Middle Ages, 1000-1500 | publisher =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 pages=244 | quote = Nearly the entire Christian fighting force (between 12,000 and 20,000 men) had been present at Kosovo, while the Ottomans (with 27,000 to 30,000 on the battlefield) retained numerous reserves in Anatolia.}}</ref><ref name=Cox>{{cite book | last = Cox | first = John K. | 제목 = The History of Serbia | publisher = Greenwood Press | pages=30 | quote = The Ottoman army probably numbered between 30,000 and 40,000. They faced something like 15,000 to 25,000 Eastern Orthodox soldiers.}}</ref><ref name=Cowley>{{cite book | last = Cowley | first = Robert | coauthor = Geoffrey Parker | 제목 = The Reader's Companion to Military History | publisher = Houghton Mifflin Books | pages=249 | quote=On June 28, 1389, an Ottoman army of between thirty thousand and forty thousand under the command of Sultan Murad I defeated an army of Balkan allies numbering twenty-five thousand to thirty thousand under the command of Prince Lazar of Serbia at Kosovo Polje (Blackbird's Field) in the central Balkans.}}</ref><ref name=VE9-0>{{cite book | 제목 = [[Vojna Enciklopedija]] | publisher = Vojnoizdavacki zavod | location = Belgrade | year = 1972 | language = Serbo-Croatian | pages = 659-660 | chapter = Kosovska bitka}}</ref><br />
|사상자1=상당히 많음;[[밀로스 오빌리크]](세르비아 귀족으로 포로가 되어 텐트에 있었음)에게 [[술탄]] 무라드 1세가 암살됨.<ref>[[오스만 제국|투르크]]의 기록에 따르면 [[무라드 1세]]는 전투가 끝나고 전장을 시찰하던 중 죽은척 하고 있던 [[밀로스 오빌리크]]에게 살해된 것으로 믿어짐. 반면에, [[세르비아]] 기록은 밀로스 오블리크가 탈영했다는 말로 투르크군 본진에 잠입한 후 무라드 1세를 암살했다고 강력히 주장함.</ref>
|사상자2=상당히 많음;전투 중 [[라자르 헤레베자노빅흐레벨랴노비치]]을 비롯한 세르비아 귀족들 다수가 죽음
}}
'''코소보 전투''' 또는 '''1차 코소보 전투'''는 [[1389년]] [[성 비투스]]의 날(6월 15일, 오늘날은 28일)에 중세 세르비아 왕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 인의 국가 역사, 전통과 신화에 중요한 부분이다.[http://www.rferl.org/featuresarticle/2007/06/56679477-132f-4def-bcd6-6705a7279e80.html]
무라드의 군대는 27,000~40,000명이었을 것이다.<ref name=Sedlar/><ref name=Cox/><ref name=Cowley/><ref name=VE9/> 만약 무라드의 군대가 4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면, 그의 군대는 2,000명~ 5,000명 정도의 [[예니체리]]군단,<ref>Hans-Henning Kortüm, ''Transcultural Wars from the Middle Ages to the 21st Century'', Akademie Verlag, 231. "But having been established under Murad I (1362-1389), essentially as a bodyguard, the Janissaries cannot have been present in large numbers at Nicopolis (there were no more than 2,000 at Kosovo in 1389)."</ref>, 2,500명 정도의 무라드 근위 기병대, 6,000명의 [[사파위]] 기병대, 20,000명의 [[아잡스]](비정규 경무장 보병)와 [[아킨시스]](비정규 경무장 기병), 그리고 8,000명의 그의 봉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ref name=VE9/>
 
라자르의 군대는 12,000- 30,000명으로 추정되는데,<ref name=Sedlar/><ref name=Cox/><ref name=Cowley/><ref name=VE9-0/> 만약 이것이 25,000명으로 추산된다면 라자르의 지휘하에는 15,000명의 병력이 있고, 5,000명은 세르비아의 귀족인 [[코소보]]의 [[불크부크 브란코빅브란코비치]]의 휘하에 있으며 나머지는 세르비아의 군사령관인 보스니아의 [[블라트코 부코빅부코비치]]의 지휘하에 있었다.<ref name=VE9-0/> 이들중에 약 몇천정도가 중무장 기병대였으나 아마 그중의 수백정도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장비하고 있었을 것이다.<ref name=VE0/>
 
양군은 일부의 외국인 군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군 내부에는 크로아티아의 [[반]]과 [[이반 팔리즈나]]에서 온 소수의 부대와 불확실하지만 [[보스니아]]에서 온 부대도 일부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오스만군은 세르비아의 귀족인 [[콘스탄티 데자노빅데자노비치]]의 지원을 받았다. 이는 일부 연구자로 하여금 군대를 동맹군으로 묘사하게끔 하였다.<ref name=VE0/>
 
== 전투 ==
전투는 오스만 궁병들이 그들을 향해 돌진하는 세르비아 중장기병들에게 화살을 날림으로써 시작되었다. 처음의 배치는 V자 모양의 형태였으며 세르비아 기병들은 오스만군의 좌익을 통해 적을 격파하려 하였으나 오스만군의 중앙과 우익의 반격에 의해 성공하지 못했다.<ref name=VE0/>
=== 투르크의 반격 ===
발칸군은 첫 번째 돌격을 통해 야큐브 셀레비가 지휘하고 있던 오스만군 날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http://www.deremilitari.org/resources/articles/emmert.htm] 기사들의 돌격이 끝난 이후, 오스만군의 경장 기병들과 경무장 보병들은 반격하는 동안 자신들의 이점을 살릴 수 있었고, 발칸군의 무거운 갑옷은 곧 불리함으로 변하게 되었다. 중앙에서 발칸 병사들은 블락토 부코빅의부코비치의 지휘하에 있는 군세들이 바예지트의 군세를 저지함으로써 오스만 군을 밀어내려 하였다. 반격중인 오스만 군은 발칸군을 밀어붙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해졌다. 이 전투를 통해서 번개("the thunderbolt")라는 별명을 얻고, 후에 술탄이 되는 [[바예지드 1세]]가 반격을 이끌었다. 날이 지자, 오스만군은 전투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 무라드의 죽음 ===
 
== 영향 ==
코소보 전투는 오스만의 중대한 승리였으며 1371년 마릿차의마리차 전투 이후 두 번째로 발칸인들, 특히 세르비아 인들을 절망에 빠트린 패전이었다. 이 두개의 전투는 모두 중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세르비아인의 심각한 패배는 오스만 군에게 공납을 바치고, 병사를 제공하는 종속국가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ref name=autogenerated5 /><ref name=autogenerated7 /><ref name=autogenerated3 /><ref name=autogenerated2 /><ref name=autogenerated8 /><ref name=autogenerated4 /><ref name=autogenerated1 /><ref name=autogenerated6 />
전투로 말미암아 세르비아 왕인 라자르가 전사하였다. [[바예지드 1세]]는 라자르의 아들 스테판을 주요 동맹으로 만들었으며 스테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혼인관계를 맺고 바예지드가 그뒤에 치르는 많은 싸움에서 중요한 구실을 맡도록 하였다.[http://byzantinesacredart.com/blog/2006/09/heike-crabs.html]
코소보 전투는 이후 세르비아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오스만 치하에 있던 19세기에 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구실을 했다. 코소보 전투의 상징성은 또한 20세기 후반의 코소보 전쟁동안 현대적인 맥락에서 쓰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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