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제2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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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제 2차 불가리아 제국 시기 불가리아에서는 이단도 널리 퍼져 있어 제 1차 불가리아 제국 시기부터 등장하였던 [[보고밀주의]]가 세력을 늘려 나갔다. 차르 [[보릴]] 시대에 차르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 사이에서 보고밀파가 유행하여 [[1211년]] 2월 터르노보 의회는 보고밀주의에 이단 선고를 내려 그들을 박해하였다.<ref>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91頁</ref>
하지만 불가리아 사회에 정착한 보고밀주의의 근절은 힘들었기 때문에<ref name="주석20"/> 정치적으로 안정된 이반 아센 2세 시대에 이에 대한 탄압은 완화되었다.<ref>クランプトン『ブルガリアの歴史』、38頁</ref> 14세기 들어 보고밀주의는 민중들을 중심으로 확산하였고 다양한 종파가 탄생하였다.<ref name="주석21">森安、今井『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147頁</ref> 하지만 14세기에 들어 다시 이단에 대한 탄압 여론이 거세져이후 이반 알렉산더르 시기의 두차례 종교 회의에서회의에서는 보고밀주의 이외에도 유대교 등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하였다.
 
귀족층에서는 14세기 중반 비잔티움 제국에서 제창된 신비주의적 경향의 [[헤시카주의]]가 유행하였다. 헤시카주의은 정교회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점도 있었기 때문에 정교 교리에 편입되어 지배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ref name="주석22">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109頁</ref> 헤시카주의은 이단, 부패한 성직자, 로마 교회와의 통합에 대한 비판 수단으로서 기능하고<ref name="주석21"/>, 문학과 예술의 발전에도 공헌했다.<ref name="주석22"/> 불가리아에서는 터르노보의 테오도시와 그의 제자 에브티미가 대표적인 헤시카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