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2세 (스페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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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카를로스 2세는 [[1661년]]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트 3세|페르디난트 3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마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펠리페 4세가 합법적인 결혼을 통해 얻은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 내에서는 [[근친혼]]이 자주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서 이들 사이에서는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가 태어나는 일이 잦았다. 펠리페 4세가 대를 이을 자식을 얻지 못하여 왕가가 끊어질까봐 걱정하였던 사람들에게 카를로스 2세의 탄생은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몸이 허약하여 5~6세가 되어서야 젖을 떼었고 걸음마를 하는 데에도 그 후 몇 년이 걸렸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홉살이 되도록 글을 읽고 쓰지 못했고, 1671년까지는 말을 탄 경험도 없었다.<ref name="vg268">비비안 그린, 《권력과 광기》, 말글빛냄, 2005, p.268~p.269, ISBN 9788995598832978-89-955988-3-2</ref> 또한 합스부르크 가 특유의 긴 턱 때문에 음식을 씹는 것도 어려웠다.<ref name="vg268"/> 카를로스 2세는 [[1665년]]에 매우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그의 모비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마리아나]]가 10년간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경험과 능력이 부족한 마리아나는 당시 스페인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몇몇 총신들에 의지해야 했다.<ref name="vg268"/>
 
궁중은 펠리페 4세의 서자였던 소(少) [[후안 호세 데 오스트리아]]와 모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마리아나]] 사이에 벌어진 권력 다툼으로 상당히 시끄러웠고, 그 결과 마리아나는 후안 호세에 의해서 쫓겨났다. 마리아나는 [[1679년]] 후안 호세가 죽자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카를로스 2세는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였다. 마리 루이즈는 [[1689년]]에 사망하였다. 그 후 카를로스 2세는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아나]]와 결혼하였다. 두 번의 결혼은 이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스페인]]의 왕위계승권을 놓고 다투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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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2세는 거의 평생 동안 [[프랑스]] 또는 [[오스트리아]]의 꼭두각시처럼 살아야 했다. 그는 프랑스인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말년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로 왕위를 넘기기 위해서 친 프랑스파와 충돌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톨레도]] 대주교의 압박으로 인해 프랑스 국왕 [[프랑스의 루이 14세|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스페인의 펠리페 5세|필리프]]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카를로스 2세는 [[1700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놓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스페인]]이 [[유럽]]에 가지고 있던 영토는 분할되어 버렸다.
 
== 주석 ==
{{Commons|Carlos II de España}}
{{1911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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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유군]]
[[분류:마드리드 출신]]
{{Authority contr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