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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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희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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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활동 ===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종, 노비들을 면천시켜 주었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다. 구한 말 의병들은 독립운동을 한다 하였으나 행진할 때 소녀 아이들이 길에 나서면 행군길을 가로질렀다 하여 함부로 총을 쏘아 죽이고 횡포를 부렸다. 그러자 홍승대는 나서서 어린 목숨을 죽여 무엇하느냐, 그냥 내 옷을겉옷을 벗겨 걸고 거기다 쏘라고 하자 의병들이 기세에 눌려 물러갔다고 한다. 이후 충주 고을에는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한다.
 
[[1910년]] [[충주군]]민들의면민들의 천거로 [[노은면]] 면장을 맡으시었으나 결국 왜놈들 심부름군에 지나지 않다는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듬해 그만두었다. 노은면장 재직 중 호적을 파기하여 종, 노비, 관청의 노비들도 모두 면천, 석방시켜 보내고, 의병에게 포위된 사람들을 구제하여 살렸다 한다. 한편, 의병들에게 끌려가 죽을죽게 고비를되었을 넘겼으나 근처 마을에 살던 농악의 상수잡이가 달려와 기지를 발휘해 그를 외삼촌이라 부르며 외삼촌을 사형시키고 내가 어떻게 살겠느냐며 군복을 벗으니 동료 의병들이 그를 풀어주었다.
 
=== 생애 후반 ===
[[1924년]] 여름 [[충청북도지사]] [[박중양]]이 농번기에 1~2개월 이상 농민들을 함부로 징집하여 [[충주]] 국도를 닦고 나중에 임금을 주지 않자 홍승대는 충청북도지사 박중양을 상대로 하여 소송을 제기, [[경성]]으로 올라가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결국 승소판결을 받고 돌아왔다. 그가 박중양 고소 건으로 [[경성]]에 올라갔을 때 일본헌병들이 집에 들어와 늘 진을 치고 있었다 하며, 훗날 그의 두 아들 홍춘식, 홍최식은 일본 경찰이 당시 몹씨 두려웠다고 회상하였다.
한편 당시 장호원에서 충주로 나는 국도는 당초 충주 노은면을 거쳐서가로질러 가도록 계획되었으나계획되어 있었으나 용원, 주덕면으로 돌아간 것은 그의 반대 때문이었다 한다. 장호원에서 충주로 가는 국도의 직선거리는 장호원 - 노은 - 충주였으나 그는 대로가 마을로 날 경우 미풍양속을 해칠 염려가 있다고 주장하여 결국 국도가 마을을 통과하는 것을 막아냈다.
 
[[1935년]] 충주군 노은면 가신리 홍골 자택에서 별세, 주덕면 국망산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