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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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년]] 헝가리의 임레 왕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 니쉬를 점령하였다. [[1203년]] 칼로얀은 이를 다시 되찾아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돌려주었다. 헝가리와 불가리아 간의 대립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중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1199년]]에 칼로얀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로마 카톨릭가톨릭교회]] 끌어들이려고 했다. 황제의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권위, 부,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던 칼로얀은 [[1202년]] 이에 답변하였다. 그는 로마가톨릭 카톨릭과세력과 연합하는 조건으로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시메온 1세]], [[페터르 1세]], [[사무일]]이 가졌던 황제의 관과 권장을 수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칼로얀은 또한 교황이 불가리아 교회의 총대주교(Patriarch) 지위를 인정하기를 원하였다.<ref>C-tin C. Giurescu, Dinu C. Giurescu, ''Istoria românilor din cele mai vechi timpuri până astăzi'', Bucharest, 1975, p.184</ref> 교황은 이러한 양보를 하고 싶지 않았고, 그의 사절인 추기경 레오가 불가리아의 수도 터르노보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터르노보의 대주교인 바실리에게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수석 주교(Primate)' 지위만을 주었다. 칼로얀은 오직 'rex Bulgarorum et Blachorum'(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왕) 혹은 rex Bulgarie et Blachie(불가리아와 왈라키아의 왕)으로서 황제가 아닌 귀일 교회(Uniate)의 왕관을 받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칼로얀은 교황에게 편지를 쓰면서 즐겁게 자신의 '황제' 대관과 '총대주교' 임명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또한 그는 교황에게 이 협정을 통해 로마 카톨릭의가톨릭의 예식을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파일:Forty Martyrs Church Svik.jpg|right|thumb|270px|[[벨리코터르노보]]의 성 40 순교자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