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세르지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22번째 줄:
687년 9월 21일 오랫동안 병세에 시달리던 교황 코논이 짧은 재위를 마치고 선종하자 그의 [[수석부제]] [[대립 교황 파스칼|파스칼]]은 [[라벤나 총독]] [[요한네스 2세 플라티누스]]에게 뇌물을 보내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은 [[수석사제]] [[대립 교황 테오도로|테오도로]]가 교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마는 파스칼을 지지하는 세력과 테오도로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두 파벌은 무장한 상태로 교황의 관저인 [[라테라노 궁전]]으로 들어가는 행렬 중에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두 파벌 간의 교착 상태가 지속되자 로마 시민 당국과 군 장교들, 성직자들, 기타 시민들은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옛 로마 황제의 궁전에서 회의를 가진 후에 세르지오 1세를 후임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라테라노 궁전을 급습하여 파스칼과 테오도로에게 세르지오 1세를 새 교황으로 인정하고 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ref name=DWB/><ref name="e216">Ekonomou, 2007, p. 216.</ref>
테오도로는 굴복하였지만, 파스칼은 겉으로는 세르지오 1세에게 굴복하는 척 하면서 라벤나 총독에게 밀사를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댓가로 많은 황금을 건네주기로 밀약을 맺었다.<ref name="e216"/> 라벤나 총독은 로마를 방문하였지만, 세르지오 1세가 정당한 방법으로 선출된 합법적인 교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는 파스칼이 교황으로 선출되면 수많은 황금을 주기로 약속했다면서 세르지오 1세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였다. 687년 12월 15일 세르지오 1세가 착좌식을 거행하였을 때, 라벤나 총독이 사망하였다. 파스칼은 이후로도 계속 교황직을 찬탈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다가 주술을 거행했다는 혐의<ref name="e216"/>로 체포되어 수도원에 강제로 구금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ref name=DWB/><ref name="e216"/>
세르지오 1세가 교황좌에 착좌하면서 비잔티움 제국 시기 동안 교황직을 둘러싸고 벌어진 마지막 분쟁이 종식되었다.<ref name="e217">Ekonomou, 2007, p. 217.</ref>
==교황==
689년 4월 10일 세르지오 1세는 로마에서 [[웨식스]]의 왕 [[웨식스의 체드왈라|채드왈라]]의 [[세례성사]]를 집전하였다.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또한 그는 [[빌리브로르도]]를 [[프리슬란트]]의 주교로, [[베르트왈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서품하였다.
698년 세르지오 1세는 옛 아퀼레이아에서 벌어진 [[삼장서 논쟁]]을 종식시켰다.<ref name=DWB/>
그리고 [[코르소 가도]]에 있는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의 [[부제 (기독교)|부제]]를 서품했으며, [[산티 코스마 에 다미아노 성당]]을 복원하여 아름답게 장식하였다.<ref>Ekonomou, 2007, p. 210.</ref>
===퀴니섹스트 공의회 반대===
세르지오 1세는 [[692년]] 트롤로 또는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나온 새로운 결정들이 [[로마]] [[교회]]의 규정들과 어긋나므로 거절하였다. 그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주교]]들은 동방 교회에 속해 있었으므로 결혼한 성직자들을 재가하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사순절]]의 규정은 [[서유럽]]의 교회와 차이가 있었다. 로마 교회 사절들도 그 결정에 서명을 하였으나 세르지오 1세는 거절하였다.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세르지오 1세의 두 참모를 체포하고 세르지오 1세까지 체포하려 했으나 라벤나, 펜타폴리스, 로마의 시민군들이 이를 저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