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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년]] 10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다녀왔다. 귀국 이후에는 의정부참지사,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1412년]]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13년 8월 도성(都城)을 수리할 때 경성수보도감(京城修補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1415년 정월 관제를 개혁하고 난 뒤 세자좌우빈객(世子左右賓客)이 되었다. 다음해 5월에는 공조판서, 6월에는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을 지냈다. 1418년 5월 판한성부사를, 6월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세종대왕]] 즉위 후에는 [[1419년]](세종 1년) 우군부판사(右軍府判事),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420년 7월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승하하자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이어 보국숭록여천부원군(輔國崇祿驪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426년 대광보국여천부원군(大匡輔國驪川府院君)에 가봉(加封)되었다.
 
1431년 5월 6일 관아에 나왔다가 아침에 갑자기 병에 걸려 별안간에 죽었다. 이때 졸(卒)하니 나이가 72세다. 성품이 평이 온아하고, 몸가짐이 근신(謹愼)하였으며,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았다. 일찍이 유서로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거든 불교 의식을 행하지 말고, 제사 음식은 많이 할 필요가 없고, 정결하기에 힘쓸 것이며, 염(殮)은 홑옷을 사용하되, 습(襲)은 다섯 겹에 지나지 말고, 염(殮)은 열 겹에 지나지 말게 하라. 만약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내 자손이 아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부음(訃音)을 듣자 사흘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렸다. 시호(諡號)를 양경(良敬)이라 하였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