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호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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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과거 [[홍건적의 난]]과 [[왜구]], 공민왕 폐위를 기도한 [[최유의 난]] 등 잦은 전란을 진압하고 평정하는 과정에서 득세한 신흥 무인 세력으로서 전투 경험도 많을 뿐더러 출정군으로 차출되기 전에는 모두 재상급에 해당하는 2품 이상의 관직을 거쳤을 정도로 전공도 뛰어난 자들이었다. 동원된 전함은 모두 314척으로 왜구로부터 빼앗은 배였으며<ref name="Imun">《이문》권2, 제주행병도평의사사신조</ref> 군사는 총 25,605명이었다. 여기에 문하평리 류연과 지밀직사사 홍사우를 각각 양광도와 전라도의 도순문사로 삼아 머물러 지키면서 혹시 있을지 모를 목호와 왜구의 합세,<ref name="Goryeosa">이미 명의 홍무제가 고려에 대해 "탐라 목호가 왜구와 합세하는 일을 경계할 것"을 지적한 바 있다(《고려사》권43, 공민왕 23년 7월조).</ref> 내지 왜구의 기습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한 고려의 토벌군은 8월에 [[나주|나주]](羅州)의 [[영산포]](榮山浦)에 다다라서 군사들의 규율을 정했는데, [[진도]]를 출발한 뒤 [[추자도]](楸子島)에 이르기까지 보름 여간에 역풍이 부는 등 바람이 좋지 않은 데다, 서해도순문사 김유의 할당 전함 1백 척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산곶에서 더 머무르려는 최영의 명을 어기고 다른 장수들은 [[보길도]]에서 먼저 배를 띄워 추자도로 향했고 최영도 어쩔 수 없이 출발하였으며, 추자도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대부분의 함대가 크게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ref name="Goryeosa"></ref>
 
8월 28일에 명월포(明月浦)에 도착한 고려군은 전임 제주목사 박윤청을 보내 탐라의 성주(星主)와 왕자(王子)를 회유하는 한편 목호들에게도 왕지문서(王旨文書)를 보내 자진 항복을 요구하면서 배 11척에 타고 있던 고려군을 먼저 상륙시켰지만, 이들은 최영이 보낸 문서를 찢어버리고 명월포에 포진해 있던 목호 지도자 석질리필사의 3천 기병에게 몰살당했고, 앞서 탐라에 와서 머무르고 있던 고려의 안무사(按撫使) 이하생도 목호의 손에 살해되었다. 앞서 몇 번에 걸쳐 고려에서 보낸 관리 인솔군을 격퇴한 적이 있는 목호의 기세뿐 아니라 탐라 주민 모두가 목호와 결탁했을지도 모른다는<ref>목호의 반기와 그 여파가 이어진 30여 년 동안 탐라와 육지부를 오가는 상인의 발길도 끊어졌는데(《세종실록》권4, 세종 원년 7월 병진조) 이로 인해서 상당수의 탐라민이 반목호성향을 지니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활동도 벌였던 근래의 동향까지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못한 채 '탐라민이 모두 목호에 붙었다'는 추측만 무성했다(김일우,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 신서원, 2000, p.382~383).</ref> 두려움에서 군사들은 더 진군하지 않으려 했고, 최영이 비장(裨將, 하급장교) 한 명을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 조리돌려 보이자 그제서야 해안에 상륙해 목호와 전투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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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빠른 배 40척을 모아 범섬을 포위하게 한 뒤 정병을 거느리고 범섬으로 들어갔고, 궁지에 몰린 석질리필사는 그의 세 아들을 데리고 나와 항복하였고 다른 목호 지도자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 뛰어내려 자결하였다.<ref name="Goryeosa">《이문》에는 석질리필사와 초고독불화, 관음보 세 사람 모두 자결하였다고 했다.</ref>.
 
최영은 항복한 석질리필사와 그의 세 아들을 모두 허리를 베어 처형하는 것은 물론, 벼랑에서 자결한 나머지 두 목호 지도자의 시신도 찾아내 목을 베었다(수급은 개경의 왕에게 보내졌다). 남은 무리들은 초무해서 양민으로 편입시켰는데, 최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달아난 석다시만(石多時萬)<ref name="Goryeosa">《이문》에는 답실만(答失蠻)으로 되어 있다.</ref> ·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 105인은 다시 동쪽으로 달아나 동도(東道) 아막을 거점으로 농성하였으나 최영은 이마저도 격파하고, 도망치는 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모두 죽였다. 이때 죽은 시체가 들에 덮여 있었다고 한다.<ref name="Goryeosa"></ref>
 
목호들을 쳐부수고 거둔 전리품 가운데 말 1,700필 중 774필은 현지 관인에게 맡겨서 기르게 하고 금패(金牌)와 은패(銀牌), 인신(印信)은 제주의 고려 관원과 탐라의 토착 지도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머지 말을 가지고 9월 22일에 명월포를 출발한 고려군은 화탈도(火脫島)에서 역풍이 불어서 명월포로 회항, 다음날 다시 출항해서 추자도에 도착했으나 10월 5일에야 추자도를 출발해 풍랑을 뚫고 소한도, 보길도, 진도 등지를 거쳐 11월 3일에야 목포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 와중에 배에 실은 말 가운데 93필이 풍랑으로 죽었다.<ref name="Imun"> </ref>
 
최영이 제주를 떠나고 13일만에 제주 본토에서는 다시 현지 사람인 마적(馬賊) 차현유(車玄有)가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불사르고 최영이 거두어 관에 맡겼던 말과 소를 죽여 잡아먹는 등 세력을 떨치다가 왕자 문신보(文臣輔)와 성주 [[고신걸|고실개]](高實開)에 의해 한 달여 만에 진압되기도 하는 등 반고려 · 반명 성향이 한동안 온존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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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진압함으로서 그때까지 반은 고려, 반은 몽골에 귀속되어 있던 제주는 완벽하게 고려에 귀속되었고, 제주는 전보다 더 많은 마필 공납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우왕 5년([[1379년]])부터 [[공양왕]] 4년([[1392년]])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려에서 명에 바친 말은 약 3만 필로 그 가운데 2만 필 이상이 탐라산 말이었다. 공민왕 19년([[1370년]])에 고려가 기왕의 연고를 내세워 탐라를 계속 고려가 관할하게 해달라는 입장을 밝혔을 때 그것을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고려를 강압해 탐라의 말을 가져가는 데서 그쳤던 명은 우왕 12년([[1386년]]) 탐라 말을 구매할 의사를 고려에 밝혔다가 바로 이듬해에 이를 철회하면서 공식적으로 탐라에 대한 고려의 관할권을 인정하였다.
 
최영이 목호들과의 전쟁으로 제주도로 내려가 있는 사이에 개경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었고, 명의 사신은 3백 필의 말을 가지고 돌아가던 중 개주참(開州站)에서 호송을 맡았던 고려의 관리 김의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는 고려와 명의 외교관계를 한참 동안 험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또한 명의 [[철령위]](鐵嶺衛) 설치에 반발하여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는데, 이때 직접 군사를 지휘하려는 최영을 [[우왕]](禑王)은 "선왕(공민왕)이 시해된 것은 경(최영)이 남쪽(제주)으로 정벌하러 나가서 개경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ref name="Goryeosa"></ref>이라며 한사코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하였고, 결국 최영 대신 요동정벌군을 지휘하게 된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와([[위화도 회군]])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위시킴으로서 [[조선]] 건국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목호의 난은 탐라에 와있던 몽골인뿐 아니라 몽골인과 탐라인 사이에 태어난 반(半)몽골화된 탐라인들도 상당수 가담해 있었으며, 목호의 난 이후 차현유와 강백언(姜伯彦) 등 탐라 토착민과 목호 잔당들이 일으켰던 반고려 · 반명 반란에는 대부분의 탐라 주민들이 거의 동참하지 않은 채 제주의 토착세력들에 의해 진압되었고, 탐라인들은 점차적으로 목호 잔당들을 배척하며 과거 목호와 살았던 사실조차 부정하려는 태도를 취해나갔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부터 세종 2년([[1420년]])까지 [[제주목]]의 판관을 지냈던 하담(河澹)은 목호의 난을 가리켜 "우리 동족도 아닌 것이 섞여서 갑인의 변(목호의 난)을 불러왔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덮었고 간과 뇌수로 땅을 발랐으니, 말하자면 목이 멘다."고 하여 치열했던 전란의 모습을 술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