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세르지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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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년 [[퀴니섹스트 공의회]]가 소집되었으며, 226명 내지는 227명의 [[주교]]가 여기에 참석하였다.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세르지오 1세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로마 관구에 예속된 고르티나의 주교 바실리오가 퀴니섹스트 공의회에 참여하자 동방에서는 그를 로마의 대표로 인식하였지만, 사실 그는 교황 특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로마를 대표해서 온 인물이 아니었다.<ref>[http://books.google.com/books?id=BwnCVYHf5VAC&pg=PA79&dq=Quinisext+Gortyna&hl=en&sa=X&ei=akKjUp7oEu_20gXFuYH4CA&ved=0CDYQ6AEwAQ#v=onepage&q=Quinisext%20Gortyna&f=false Wilfried Hartmann, Kenneth Pennington (editors), ''The History of Byzantine and Eastern Canon Law to 1500'' (CUA Press 2012 ISBN 978-0-81321679-9), p. 79]</ref>
 
세르지오 1세는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법령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반대하였으며, 오류가 있는 법령에 동의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천명했다.<ref>Hartmann (2012), p. 82</ref> and오류가 declared있는 that법령에 he동의하느니 would차라리 "rather죽음을 die택하겠다고 than consent to erroneous novelties"천명했다.<ref name="e222">Ekonomou, 2007, p. 222.</ref> 이어서 그는 자신이 비록 동로마 제국의 신민이기는 하지만, 종교에 관한 문제에서는 세속 정부의 압력을 받지 않을 자유가 있기 때문에,<ref name="e222"/> 퀴니섹스트 공의회를 인정한다는 서명을 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앤드루 J. 에코노무 등의 학자들은 세르지오 1세가 퀴니섹스트 공의회의 어느 법령을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를 추정하였다. 그는 세르지오 1세가 [[교황 호노리오 1세]]를 파문한 것과 더불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에는 동의하였지만, 로마 다음가는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에는 배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e222"/> 사실 [[교황 레오 1세]] 이래 모든 교황은 [[칼케돈 공의회]]의 교회법 제28항을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이 조항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지위를 옛 로마의 총대주교, 즉 교황과 동등한 지위로 올려놓으려 했기 때문이다.<ref name="d220">Davis, Leo Donald, ''The First Seven Ecumenical Councils (325-787)'',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1990) p. 194</ref> 에코노무에 의하면,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는 총 85개 조항을 신설하였지만, 세르지오 1세는 그 가운데 50개 조항만을 인정했다고 한다.<ref name="e222"/>
 
세르지오 1세는 [[692년]] 트롤로 또는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나온 새로운 결정들이 [[로마]] [[교회]]의 규정들과 어긋나므로 거절하였다. 그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주교]]들은 동방 교회에 속해 있었으므로 결혼한 성직자들을 재가하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사순절]]의 규정은 [[서유럽]]의 교회와 차이가 있었다. 로마 교회 사절들도 그 결정에 서명을 하였으나 세르지오 1세는 거절하였다.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세르지오 1세의 두 참모를 체포하고 세르지오 1세까지 체포하려 했으나 라벤나, 펜타폴리스, 로마의 시민군들이 이를 저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