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세르지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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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니섹스트 공의회는 전례 양식과 성직자 양성 등 기존의 교회 관행들을 단일화하는데 중점을 두고 여러 가지 규정을 제정해 법제화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동방 교회의 성직자들로만 구성되었던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모든 것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관행을 중심으로 삼았다.<ref name=Ostrogorsky1957>{{Cite book | last = Ostrogorsky | first = George | last2 = Hussey |first2 = Joan (trans.) | year = 1957 | title =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 isbn = 0-8135-0599-2 | publisher = Rutgers University Press | location = New Brunswick, N.J. |pages = 122–23 }}</ref> 그러한 배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방 교회의 눈에 거슬렸던 서방 교회의 여러 가지 관행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는데, 가령 [[사순 시기]]에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가 아니라) 주중에 미사를 봉헌하는 것과 더불어 매년 토요일마다 단식하는 관습, 사순 시기에 [[알렐루야]]를 생략하는 것,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 등이 그것이다. 더 큰 문제는 [[사제]]와 [[부제]]의 독신 생활과 관련해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사고방식이 첨예하게 다른 것이었다.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기혼자도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누구든지 성직자를 그의 아내와 갈라놓으려 하거나, 어느 성직자든 간에 자신의 아내를 버리려 할 경우에는 [[파문]]에 처한다는 규정을 제정하였다.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세르지오 1세는 대중을 위해서는 상징적인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미사 중 성체를 쪼갤 때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성가로 부를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안마당에 있는 어린 양으로 묘사된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장면을 담은 모자이크를 복원하도록 지시하였다.<ref name="e223">Ekonomou, 2007, p. 223.</ref> [[하느님의 어린 양]]은 세르지오 1세가 제정한 여러 가지 전례 예법 가운데 하나로서 초창기에는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로도 노래하였다.<ref>Ekonomou, 2007, p. 250.</ref>
 
세르지오 1세는 [[692년]] 트롤로 또는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나온 새로운 결정들이 [[로마]] [[교회]]의 규정들과 어긋나므로 거절하였다. 그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주교]]들은 동방 교회에 속해 있었으므로 결혼한 성직자들을 재가하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사순절]]의 규정은 [[서유럽]]의 교회와 차이가 있었다. 로마 교회 사절들도 그 결정에 서명을 하였으나 세르지오 1세는 거절하였다.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세르지오 1세의 두 참모를 체포하고 세르지오 1세까지 체포하려 했으나 라벤나, 펜타폴리스, 로마의 시민군들이 이를 저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