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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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국기나라|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br />(현 {{국기나라|대한민국}}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79|10|26|1917|11|14}}
|사망지 = {{국기나라|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나동
|매장지 = {{국기나라|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2동 [[국립서울현충원]]
|정당 = [[남조선노동당]],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학력 =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일본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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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크기 = 300px
|설명 =
|별명 = 호 중수(中樹), 창씨개명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태어난 곳 = {{국기나라|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525번지
|죽은 곳 =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나동
|복무 = [[파일:Flag of Manchukuo WarFlag And Naval Ensign.svg|22px]] [[만주국 육군]], <br /> [[파일:Flag of the Army of of the Republic of Korea.svg|22px]]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 [[1944년]] [[7월]] ~ [[1945년]] [[7월]] ([[만주국 육군]]), <br /> [[1946년]] [[12월]] ~ [[1962년]] [[8월]] ([[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 = [[파일:Lieutenant rank insignia (Manchukuo).png|40px]] [[만주군]] [[육군]] [[중위]]<br />[[파일:대장.JPG|40px]] [[대한민국]] [[육군]] [[대장 (군인 계급)|대장]]
|지휘 = 5사단, 육군정보학교, 7사단, 제2군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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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ref name="조갑제318">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조선일보사]], 1998) 318~320쪽 참조. </ref>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군인]]·교사·정치가이며 제5·6·7·8·9대 대통령이다. [[호 (이름)|호]](號)는 '''중수'''(中樹), 본관은 [[고령 박씨|고령]](高靈)이다. 또한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3년간 교사로 근무했고, 만주군관학교 졸업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일본육군사관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여 졸업, 만주 보병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이후에는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를 지내다 1946년 7월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지냈고, 대한민국 국군건국 장교로 지내며이후에 [[남조선대한민국 로동당국군]]에서 군사총책을 맡았다가 [[여수·순천 사건]] 때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 후 동료들을 밀고하여 수사에 협조하였고, [[백선엽]] 의 선처요청 후에 이어진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실형을 면하고 강제 예편되었다.장교로 [[한국 전쟁]]이 나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참전하였다.<ref>[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61100009&ctcd=C03 ‘박정희 공원’ 논란 신당동 집 42년 전에 무슨 일이…] 조선일보, 2013년 06월 17일</ref><ref>[http://www.hani.co.kr/section-014001000/2000/014001000200011151711015.html 박정희기념관'을 반대하는 이유] 한겨레, 2000년 11월 15일</ref>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과 의장, 그리고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대통령|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독재 장기집권을 반대하던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 등 민주화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1979년]] [[10월]]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난지 얼마되지 않아충돌하였고 [[1979년]] [[10월 26일]] 가수 심수봉, [[한양대학교]] 여학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권총에 사망하였다암살당했다.([[10·26 사건]])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으로 다양하게 나뉘고 있다. 전쟁과 가난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 경제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의견이 많다. [[새마을운동]]은 농촌 발전에 대한 성공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나 부정적인 평가에서는 개발위주의개발 획일화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받기도 한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0/2009121001803.html 아시아·아프리카 20개국 70명 "한국은 우리가 본받을 모델"]</ref><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1297473&cp=nv “한국 산업 앞선 경험 배우러 왔죠” 왕양 中 광둥성 당 서기 방한]</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152943 오방색 걸친 상처입은 산하“개발의 잔혹함 그리고 싶었다”]</ref>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평가 등에 대해 상위를1위를 차지하고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141835525&code=210000 “60년 최대 성과는 산업화” 56% 경향신문 2008. 8]</ref><ref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1016002863&subctg1=&subctg2= 박정희 바로 세우기] 세계일보, 2009년 10월 16일</ref><ref>[http://www.newsva.co.kr/uhtml/read.jsp?idxno=381310&section=S1N54&section2=S2N235 역대 최고 대통령에 박정희 압도적 1위] 아시아경제, 2008년 8월 14일</ref>
 
[[5·16 군사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독재 등 [[민주주의]] 후퇴시켰다는발전을 저해했다는 부정적인 평가<ref>{{뉴스 인용 |제목 = “성장·개발 향수 떨쳐내고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035342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김재중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9-10-26 |확인일자 = 2009-11-19}}</ref>가 존재한다. [[한일협정]]을 강행한<ref>{{뉴스 인용 |제목 =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49552 |출판사 = 오마이뉴스 |저자 = 정운현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4-08-29 |확인일자 = 2009-11-19}}</ref> 것과 [[베트남 전쟁|월남전]]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People/Article.asp?aid=20060628000574&ctg1=01&ctg2=00&subctg1=01&subctg2=00&cid=0101120100000&dataid=200606281532000111 월남전 파병은 정당했다] 세계일보 2006-06-29</ref><ref name=autogenerated14>{{뉴스 인용 |제목 = 파병 논란 아직도 현재진행형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280243 |출판사 = 한국일보 |저자 = 김정곤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5-04-27 |확인일자 = 2009-11-19}}</ref> 핵개발<ref>{{뉴스 인용 |제목 = ‘아이리스’에 비친 한국인의 핵무기 열망 |url =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5948&sc=naver&kind=menu_code&keys=4 |출판사 = 데일리안 |저자 = 김헌식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9-10-22 |확인일자 = 2009-11-19}}</ref>을 추진하였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으로 다양하게 나뉘고 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 발전에 대한 성공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나 부정적인 평가에서는 개발위주의 획일화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는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0/2009121001803.html 아시아·아프리카 20개국 70명 "한국은 우리가 본받을 모델"]</ref><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1297473&cp=nv “한국 산업 앞선 경험 배우러 왔죠” 왕양 中 광둥성 당 서기 방한]</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152943 오방색 걸친 상처입은 산하“개발의 잔혹함 그리고 싶었다”]</ref>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평가 등에 대해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141835525&code=210000 “60년 최대 성과는 산업화” 56% 경향신문 2008. 8]</ref><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1016002863&subctg1=&subctg2= 박정희 바로 세우기] 세계일보, 2009년 10월 16일</ref><ref>[http://www.newsva.co.kr/uhtml/read.jsp?idxno=381310&section=S1N54&section2=S2N235 역대 최고 대통령에 박정희 압도적 1위] 아시아경제, 2008년 8월 14일</ref>
 
[[5·16 군사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ref>{{뉴스 인용 |제목 = “성장·개발 향수 떨쳐내고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035342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김재중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9-10-26 |확인일자 = 2009-11-19}}</ref>가 존재한다. [[한일협정]]을 강행한<ref>{{뉴스 인용 |제목 =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49552 |출판사 = 오마이뉴스 |저자 = 정운현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4-08-29 |확인일자 = 2009-11-19}}</ref> 것과 [[베트남 전쟁|월남전]]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People/Article.asp?aid=20060628000574&ctg1=01&ctg2=00&subctg1=01&subctg2=00&cid=0101120100000&dataid=200606281532000111 월남전 파병은 정당했다] 세계일보 2006-06-29</ref><ref name=autogenerated14>{{뉴스 인용 |제목 = 파병 논란 아직도 현재진행형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280243 |출판사 = 한국일보 |저자 = 김정곤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5-04-27 |확인일자 = 2009-11-19}}</ref> 핵개발<ref>{{뉴스 인용 |제목 = ‘아이리스’에 비친 한국인의 핵무기 열망 |url =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5948&sc=naver&kind=menu_code&keys=4 |출판사 = 데일리안 |저자 = 김헌식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9-10-22 |확인일자 = 2009-11-19}}</ref>을 추진하였다.
 
== 생애 ==